웃음의 공학, 과잉의 미학

뮤지컬 <썸씽로튼>

by 말하는 돌

뮤지컬 썸씽로튼(Something Rotten!)은 이야기의 완결성이나 감정의 깊이로 승부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이 선택한 전략은 분명하다. 그것은 웃음의 과잉, 그리고 그 웃음을 만들어내는 공연 장치들의 노골적인 자기 과시다. 르네상스 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무대는 역사극의 재현이 아니라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를 해부하고 조롱하는 메타-공연에 가깝다. 썸씽로튼은 서사를 전달하기보다, 공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의 공연미학은 무엇보다 속도의 미학 위에 구축되어 있다. 대사는 숨 가쁘게 이어지고, 농담은 한 박자 쉬지 않고 던져진다. 말장난, 시대착오적 농담, 뮤지컬 팬을 겨냥한 내부자 유머가 연속적으로 포개진다. 관객은 웃음을 곱씹을 틈도 없이 다음 장면으로 밀려간다. 이 과잉된 리듬은 단순한 코미디 효과를 넘어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규칙과 관습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노출시킨다. 웃음은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기계적으로 설계된 반응처럼 작동한다.


무대 위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단연 넘버 〈A Musical〉이다. 이 장면에서 썸씽로튼은 뮤지컬의 문법을 거의 백과사전처럼 나열한다. 탭댄스, 재즈 핸즈, 군무의 대형 변화, 클리셰적인 감정 고조, 유명 작품에 대한 노골적인 인용들이 폭죽처럼 터진다. 이 장면의 쾌감은 “잘 만든 뮤지컬”을 본다는 만족감이 아니라, 뮤지컬이 얼마나 반복과 공식의 집합체인가를 알아차리는 순간에서 발생한다. 관객은 웃으면서 동시에 깨닫는다. 우리가 사랑해 온 장르의 감동은, 사실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장치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무대미술과 안무 역시 이 자기 폭로의 전략에 충실하다. 세트는 르네상스 시대를 연상시키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부는 철저히 브로드웨이식 쇼의 구조를 따른다. 장면 전환은 빠르고, 무대는 언제든 군무를 수용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안무는 ‘아름답다’기보다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구성된다. 관객이 즉각적으로 장르적 인용을 인식할 수 있어야 웃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미학적 세련됨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대신 선택되는 것은 즉각적 가독성과 과잉된 명료함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셰익스피어다. 그는 위대한 극작가이자 동시에 록스타처럼 과장된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 셰익스피어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천재 서사’ 그 자체의 풍자다. 무대 위에서 그는 재능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모든 창작자가 느끼는 열등감의 대상이다. 이 인물의 과잉된 존재감은 썸씽로튼이 다루는 핵심 주제—창작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를 희극적으로 드러낸다. 위대한 예술은 신비의 영역이 아니라, 소비되고 숭배되는 이미지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웃음으로 폭로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공연미학이 단순한 패러디에 머물지 않는 지점은, 관객을 결코 냉소의 자리로 밀어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썸씽로튼은 뮤지컬을 비웃지만, 동시에 뮤지컬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수많은 인용과 농담은 조롱이 아니라 헌사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작품의 웃음은 파괴적이기보다 공모적이다. 관객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그 농담에 함께 웃는 공범이 된다.


결국 썸씽로튼의 공연미학은 감동의 서사가 아니라, 장르 인식의 쾌감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왜 뮤지컬을 좋아하는가’를 묻기보다, ‘우리가 뮤지컬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목격한다. 과잉된 웃음, 노골적인 인용, 빠른 리듬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장르의 허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력이다. 썸씽로튼은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진지하지 않아 보여도,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다시 뮤지컬을 사랑하게 된다고.

일요일 연재
이전 08화노래하고 싶었던 형과 노래할 수밖에 없었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