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썸씽로튼>
뮤지컬을 볼 때마다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왜 이 장르에서 사람들은 말 대신 노래하는가. 왜 감정은 대사로 끝나지 않고 멜로디를 타는가. 〈썸씽 로튼〉은 이 오래된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 전체를 하나의 자기 질문으로 만든다. 이 질문은 바텀 형제를 통해 분기된다. 닉 바텀과 나이젤 바텀, 같은 시대에 살고 같은 극단에 몸담고 있지만, 그들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는 곧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두 얼굴을 드러낸다.
닉 바텀은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비교한다. 셰익스피어와 자신을, 타인의 박수와 자신의 침묵을. 그에게 음악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노래는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이며, 흥행을 보장하는 공식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미래를 점치는 노스트라다무스에게 매달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장르인 ‘뮤지컬’을 예언처럼 받아들인다. 그의 상상 속에서 뮤지컬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계산된 기술이다. 언제 노래가 시작되고, 얼마나 과장되어야 하며, 관객이 웃어야 할 타이밍이 어디인지까지 미리 정해져 있다.
반면 나이젤 바텀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대한다. 그는 노래를 선택하지 않는다. 노래가 먼저 그를 선택한다. 사랑에 빠지면 멜로디가 생기고, 감정이 차오르면 말보다 노래가 앞선다. 나이젤에게 음악은 전략이 아니라 반사에 가깝다. 그래서 그는 성공에 집착하지도, 셰익스피어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대의 크기가 아니라, 감정이 흐를 수 있는 통로다.
이 형제의 대비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태어나는 두 조건을 보여준다. 하나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하나는 표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감정이다. 뮤지컬은 언제나 이 둘 사이에서 진동한다. 닉처럼 뮤지컬을 ‘만들려고’ 할 때 장르는 어색해지고, 나이젤처럼 뮤지컬을 ‘살아낼’ 때 장르는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뮤지컬은 닉의 과잉과 나이젤의 순수함이 동시에 존재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닉 바텀은 뮤지컬을 오해한 인물이다. 그는 노래를 공식화하고, 감정을 구조화하려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오해 덕분에 관객은 뮤지컬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다. 뮤지컬은 본래 과장된 장르다. 감정은 넘치고, 몸은 지나치게 움직이며, 현실의 리듬을 배반한다. 닉의 실패는 장르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장르가 감수해야 할 위험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다. 뮤지컬은 늘 어딘가 민망하고, 늘 조금 과하다. 닉은 그 과잉을 숨기지 않는다.
반대로 나이젤은 뮤지컬이 왜 여전히 유효한지를 보여준다. 그의 노래는 설명이 아니라 고백이고, 연출이 아니라 호흡이다. 그는 뮤지컬을 ‘이해’하지 않아도 이미 뮤지컬 속에 있다. 그러나 나이젤만으로는 장르가 성립하지 않는다. 뮤지컬은 개인의 진정성만으로는 무대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사랑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왜 여전히 뮤지컬을 보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대부분 닉이면서 동시에 나이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공하고 싶어 계산하면서도, 감정이 차오르면 어쩔 수 없이 노래하고 싶어진다. 〈썸씽 로튼〉은 뮤지컬을 찬양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뮤지컬은 위대한 장르가 아니라, 노래하고 싶었던 인간들의 다소 엉성한 선택이라고. 그리고 그 선택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