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과 시간의 감수성

박광진: 기다린 계절

by 말하는 돌

《박광진: 기다린 계절》은 제주와 평생을 함께해 온 원로 화가 박광진(1935~)의 가을·겨울 풍경화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시다. 1964년 이후 수십 년간 제주 자연과 맺어 온 관계를 회화로 누적해온 작가는, 한라산·오름·억새·단풍·눈 덮인 숲 등 다양한 자연 풍광을 통해 제주 사계의 정서를 섬세하게 담아왔다.


전시는 ‘기다린 계절’이란 제목처럼, 시간을 견디고 안쪽으로 흘러온 자연의 표정을 붙잡아 내는 시선을 보여준다.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는 순간, 붉게 물든 산과 들판, 겨울 숲의 고요는 모두 하나의 감각 풍경으로 수렴한다. 이러한 감성은 관람자가 작품 앞에 서는 순간 곧장 체감된다.


박광진의 화풍은 사실적 묘사에 바탕을 두면서도 풍경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색채와 붓질은 때로는 현실보다 더 풍부한 감상을 드러내며, 자연의 리듬과 마음의 온도를 동시에 포착한다. 특히 억새의 얇은 줄기와 하늘의 잔여 공간, 경쾌하게 흔들리는 억새숲의 반복적 패턴은 인간의 시선과 자연의 움직임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이 전시는 단지 ‘풍경 전시’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과 함께 마련된 관람객 참여 공간 ‘머문 계절’에서는 관람자가 직접 풍경을 컬러링하며 작품과 감각적으로 교감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계절과 색채, 기억 사이의 상호적 체험을 강조한다.


이 전시는 제주 자연을 바라보는 한 화가의 일생의 시선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자리다. 눈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색채, 바람이 남긴 흔적처럼 부드럽게 흔들리는 억새, 계절의 경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은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기다림’의 미학으로 읽힌다. 전시장 안의 풍경들은 곧 관람자의 내면 풍경과 교차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는 시간과 계절의 감각을 다시 일깨운다.

토요일 연재
이전 15화여성 신체와 조화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