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심해

윤명로의 회화 읽기

by 말하는 돌

태양의 빛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깊은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윤명로의 《문신 64-12》는 바로 그 풍경을 닮아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푸르스름한 색채와 요동치는 곡선은, 머릿속에 막연히 떠올리는 모든 파란빛을 한데 뒤섞은 듯하다. 수많은 파란색이 빈틈없이, 촘촘히, 겹겹이 채워져 있어 맑기보다는 탁하다. 흐르는 물결, 물고기의 비늘, 해저의 암석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바닷물의 빛깔이 캔버스를 뒤섞어 놓은 듯하다. 어떤 규칙도 없이, 어느 곳은 밝고 또 다른 곳은 어둡다. 느닷없이 녹색이 비치고, 불현듯 붉은빛이 스친다. 마치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위를 올려다볼 때처럼, 수많은 색채가 일렁인다. 그 넓이를 한눈에 담기 어려운 캔버스는 감상자를 알 수 없는 잠식의 감각 속으로 끌어들이며, 파란색이 우울의 감정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혹은 어쩌면, 그 색채가 직접적으로 전하는 고독과 침잠의 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감상자는 화면이 뿜어내는 정서에 압도당한 채, 무력하게 한 걸음 더 다가간다.



얼룩진 푸른빛 위에는 석고 가루가 섞인 물감이 덩어리째 덧대어져 있다. 구상도 의도도 없이, 흩뿌려지고 쌓인다. 눅진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네 개의 손가락이 화면 전체를 종횡무진 훑고 지나간다. 손끝이 만들어낸 곡선은 마치 위아래로 일렁이는 파도를 연상시킨다. 통제받지 않은 제스처는 석고 물감을 이끌고 화면 위에서 요란한 소동을 벌인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손의 움직임은 서로 얽혀 말라붙은 파란 물감과 함께 건조하게 굳어간다. 광택 없는 표면 위, 파인 궤적을 따라 감상자의 시선도 빠르게 이동한다. 화가의 격정적 감정이 손끝에서 직접적으로 남긴 흔적은, 감상자에게 촉각적 제스처를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구체적인 형상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환상적인 형상의 거친 에너지는 분명하게 전달된다.



그 손끝의 흔적들 사이로 어두운 파랑 틈에 붉은빛이 은은히 새어 나온다. 마치 성냥이 거친 표면을 빠르게 스치고 간 자국 같다.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차갑던 화면에 움직임에서 비롯된 미세한 온기가 감돈다. 바쁘게 움직이던 시선이 멈추는 지점, 다홍색 점 다섯 개가 나란히 등장하는 삼각형의 공간이다. 마치 화면을 헤집고 다니던 손끝에서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열기가 붉은 물감이 되어 점을 찍은 듯하다. 꿈틀거리던 곡선들의 마침표처럼, 감상자의 시선도 그 다섯 점에서 멈추고 숨을 고른다. 마구 덧발라진 석고 물감은 이 지점에서 평평하게 눌려 널찍하게 펼쳐져 있다. 그 강한 압력에 곡선의 흔적도 쓸려 사라졌다. 마티에르가 부재한 이 공간은 캔버스에 스며든 푸른빛만으로 채워져 있다. 격동의 제스처에서 피어난 열기를 식히고, 움직임을 잠재우는 듯한 경계가 화면 위에 도드라진다. 양면적인 화가는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것을 잠재우기도 하며 이 짙은 푸른빛 화면을 구성해 낸다.



누구도 고인 물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의 터전이다. 그 움직임엔 명확한 이유도 목적도 없다. 다만, 그 멈추지 않는 흐름 속에 생의 에너지가 깃들어 있을 뿐이다. 윤명로의 화면에 가득한 어둡고 탁한 파란빛은, 마치 우울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세게 요동치는 제스처의 흔적과, 그 끝에서 마침내 맞닥뜨리는 고요한 영역은, 차가운 화면 위에 나지막한 온기를 만들어낸다. 만일 화면에 잠식당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미세한 따뜻함이다.



소란한 바다의 움직임은 언제나 그 표면에서 발생한다. 부서지는 파도는 바다 한가운데서가 아니라, 해안의 모래사장에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깊은 바닷속 해류는 표면처럼 격렬하게 요동치지 않는다. 단지 원래 그래왔던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흐를 뿐이다. 이 작품이 바다라면, 화면의 험한 흐름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이 우울의 시대 속에서도 완전히 침몰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시리도록 차가운 색과 마찰하며 아주 작은 온기를 만들어내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절망의 시대를 견딘 화가가 마지막까지 지켜낸 단 하나의 몫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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