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의 지대

장성순의 회화 읽기

by 말하는 돌

장성순의 《0의 지대》는 녹색의 기운이 감도는 갈색빛이 화면을 촘촘히 덮고 있다. 멀리서 보면 화면 가장자리는 어두운 고동색, 중앙은 옅은 녹색을 띠고 있어 마치 습한 숲 속의 한 장면, 혹은 이끼 낀 땅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축축한 흙 위에 초록빛 생명체가 내려앉은 풍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곧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구상적 형태나 재현적 표현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땅’이라 느꼈던 화면은 엉겨 붙은 물감의 질감과 뒤섞인 색채로만 구성되어 있다.


화가는 일정한 방향 없이 진득한 물감 반죽을 켜켜이 바르고 펼쳐 놓았다. 자유로운 붓질과 덧칠은 시간의 흔적처럼 물감의 두께를 만들어내며, 특히 화면 하단 중앙에는 열 번 이상 반복된 가로선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시선을 옮기면, 화면 상단 중앙부는 가로와 세로를 구분하지 않은 붓질로 구성되어 있어 그 순서를 알기 어렵다. 가로선 아래에는 세로로 휘청이는 선, 물결처럼 번진 선, 지그재그로 흔들리는 선들이 공존하며, 화면 가장자리로 갈수록 물감의 흔적은 사라진다. 두껍고 얇게 칠해진 면들이 뒤섞이며, 강요되지 않은 손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장성순은 단순히 물감만 사용하지 않았다. 아연화 가루를 섞은 걸쭉한 반죽을 캔버스에 덕지덕지 붙이고, 그 위에 테레빈유(소나무 수액의 정류액)를 뿌려 불을 붙였다. 태우고, 식히고, 다시 태우는 반복된 행위 속에서 작품은 우연의 형상을 품는다. 불에 그을린 표면은 부글부글 끓은 흔적을 남긴다. 거기엔 굳어진 기포도, 터져버린 흔적도, 혹은 완성 후 깨진 듯 하얀 석고가 드러난 자국도 있다. 화가는 이 기포들을 다듬지 않았다. 생겨난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특히 화면 중앙부에는 밝은 녹색빛 아래에 유난히 많은 기포가 모여 있다. 불을 가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화가는 자의적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우연의 형성력을 존중한 것이다.


이렇듯 불의 행위는 화면 위에 우연하고 자연스러운 시각 언어를 새긴다. 불이 지나간 자리는 재의 폐허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터전이 된다. 화가는 그 위에 갈색과 녹색을 다시 덧입혔다. 붓의 흔적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매우 투명하게 채색되어, 아래 깔린 색이 비쳐 보일 정도다. 불에 그을린 듯한 흔적은 화면에 생경함보다도 차분한 인상을 더한다. 인간이 안정감을 느끼는 색채인 갈색은, 습한 흙부터 마른 모래까지 자연 속 다양한 ‘땅’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며 화면을 안정시키는 기조가 된다.


전체 화면은 마치 녹갈색 액체를 흘려놓은 듯 얼룩져 있다. 그 얼룩은 수직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세로보다 긴 직사각형의 화면 한가운데에서 은근한 흐름을 형성한다. 색채의 경계는 명확하진 않지만, 갈색과 녹색이 만나는 지점이 화면을 나눈다. 왼쪽 경계는 일그러지고 출렁이며 비교적 뚜렷하게 가장자리와 중앙을 구획하고, 오른쪽은 부드럽게 녹아들 듯 색이 혼합된다. 좌우는 어둡고 중앙은 밝은 녹색이며, 그 안쪽에 다시 어둠이 등장한다. 작고 동그란 형상으로, 완전한 원이 아닌, 한쪽이 도려진 듯한 그림자다. 검은색이라기보다는 불에 탄 그을음의 색이며, 화면 속에서 조용히 스며들어 존재감을 드러낸다. 거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음에도 주제부라기보다는 비물질적인 흔적에 가깝다. 그 안에는 기포도, 물감의 덧발림도 없다.


그제야, 지나치기 쉬웠던 작품의 제목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0의 지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혹은 모든 것의 기원이자 시작점. 그 동그란 어둠이 바로 '0'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불태우고, 덧칠하고, 소멸과 재생을 반복한 이 화면 전체가 하나의 ‘제로 지대’ 인지도 모른다. 장성순의 《0의 지대》는 그렇게 존재와 비존재, 형상과 흔적, 우연과 개입 사이의 긴장 위에서 스스로의 기원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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