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SS 서울패션위크 리뷰
나빌레라는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의 한 구절이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디자이너 감선주는 자신의 쇼노트에서 담담한 대화체로 또 다른 승무의 싯귀를 다시 인용했다.
행복을 위해 달렸는데 결과는 행복이 아닐 때가 많죠.
그러나..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는 믿음으로..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시작합니다.
세상의 번뇌를 고운 춤으로 승화시킨 승무처럼 이번 시즌 감선주는 촘촘하고 결이 고운 치유의 시(詩)를 써 내려갔다. 때로 세상은 우리의 희망에 절망으로 대답한다. 또 이제 충분히 지쳤노라 생각한 순간에 다시 처음부터 걸어보라고 무심한 요구를 들이대기도 한다. 그런 막막한 순간을 너무 오래 지나고 있는 사람들, 감선주는 그들의 응어리를 따뜻하고 아름다운 스타일들로 감쌌다.
쇼는 송철의 작가의 사진들로 시작되었다. 제주도에서 Soundrawing이란 갤러리를 운영하는 송철의의 사진은 외롭고 따뜻한, 무아(無我)의 정경을 빚어낸다.
아이슬란드와 제주의 풍경을 담은 그의 작품이 배경에 펼쳐지면서, 하얀 족두리를 머리에 쓴 모델들이 느린 템포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복에서 영감을 얻은 소담한 실루엣의 하얀 드레스와 족두리의 모델들이 송철의의 사진들과 빚어내는 하모니는 애처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감선주는 쇼노트에서 그렇게 썼다.
우리나라 여인들의 희노애락을 나타내는 의복에서 영감을 받아
흐드러지는 감정을 곱게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쌓이고 쌓이는 겹침, 자유로운 실루엣이 연출되는 무계획적 실루엣,
안과 밖이 구분이 없는 공간성, 무심함, 무작위..
과욕이 없어 보이는 소박한 자연스러움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스런 빛깔에 TheKam 19SS를 녹여보았습니다
나로선 경력 20년의 에디터지만, 이 쇼노트보다 멋진 말로 그녀의 의상들을 표현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사실 한복의 디테일을 그대로 가져온 의상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변주한 것은 도리어 지금 유행하는 화이트 러플 피스들과 트렌치 코우트들, 풀 스커트들이었지만 쇼를 보는 내내 그 안에 서려있는 한복의 영감들은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 몽환적인 올 화이트(All White)의 컬렉션에서 또 하나 감선주의 저력이 빛을 발한 것은 ‘텍스쳐’였다. 그녀는 모든 화이트에 각기 다른 텍스쳐를 부여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쌓이고 쌓이는 겹침’이라는 것이 각박한 현대를 살아내는 이들의 마음에 쌓인 감정의 깊이라면 그건 분명코 단순하고 매끄러운 것들은 아닐 것이다.
레이스, 도비(Dobby), 자카드(Jacquard), 브로더리 앙글레이즈(Broderie Anglaise) 등, 풍부한 텍스쳐의 직물들이 단색의 컬러로 된 컬렉션에 섬세한 결과 깊이를 더해나갔다. 이는 오랜 기간, 노련하게 패션을 다뤄온 디자이너만이 이뤄낼 수 있는 소재의 조합이었고. 자칫 춘하시즌용 화이트 소재들이 가질 수 있는 무미건조함에 비로소 감정을 불어넣는 신의 한 수였다.
패션이란 무엇일까. 패션은 분명 커머셜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공산품은 아니다. 감정이 서려있는 유일한 커머셜, 어쩌면 패션의 본질은 그것인지도 모른다. 더캄의 2019 춘하 컬렉션은 패션이란 감정의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우리나라 말 중에 ‘감동’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으로 심금(心琴)을 울린다는 말이 있다. 마음속의 거문고가 저절로 울린다는 뜻이다. 감선주의 쇼는 보는 이들의 마음에 현(絃)을 울렸다.
지친 이들을 잠시 고요한 초원에 데려가 쉬게 하고, 화난 이들을 따스한 순백의 위로로 가라앉히는 쇼.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그간 잊고 있던 패션의 또 다른 본질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