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코 Mar 15. 2023

한겨울에 산 수영복

겨울에 패딩은 없고 수영복을 파는 미네소타에 대하여


이 동네는 참 빠르다. 11월 말부터 온 동네가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바뀌더니, 1월 밖에 안됐는데 마트에 스키 장갑, 썰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옷 가게엔 봄옷이 진열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바깥은 아직 흰 눈으로 덮여 있고, 미네소타의 겨울은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말이다. 생각보다 아주 빠른 미네소탄들 덕에 남은 겨울 동안 입을 만한 패딩 점퍼를 사러 쇼핑몰에 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이렇게 추운데 어떻게 패딩을 안 파냐며 미네소타 토박이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친구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겨울 시즌이 끝나서 그래.'


타겟 (Target. 미국의 대형마트 체인 중 하나)의 의류 코너에는 수영복도 등장했다. 한겨울에 여름 시즌에나 볼 법한 마트의 수영복 코너라니. 패딩은 안 팔면서 수영복을 파는 모습이 조금 얄밉긴 했지만, 겨울에는 느낄 수 없는 여름의 쾌청한 분위기에 이끌려 수영복 매대로 홀린 듯이 들어갔다. 그러다 꽤 마음에 드는 수영복을 발견했다. 어두운 남색으로 된 귀여운 체크 패턴의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당장 입지도 못 할 수영복을 사자니 충동구매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패딩 대신이라 치고 마음에 든 수영복을 카트에 담았다.


집에 돌아와 사 온 수영복을 다시 입어 보면서 여름이 오는 순간을 떠올려 봤다. 수영복을 입고 동네 공원의 수영장으로 뛰어 드는 내 모습이 상상된다. 호수에 가서 책을 읽다가 날씨가 더우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지고 수영복 차림으로 물에 들어가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머릿속으로 수영복과 함께 보낼 여름의 장면을 그려보다가 문득 한겨울에 등장한 수영복 코너의 존재 이유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이곳 사람들은 좋아하는 계절을 그 계절의 물건과 함께 기다리는 게 아닐까. 기다리는 계절의 물건을 미리 사두고, 물건과 함께 보낼 계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계절을 기다리는 것. 길고 긴 겨울이 곧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봄옷을 사고, 여름 수영복을 사는 것. 이곳 사람들이 길고 긴 겨울을 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수영복을 샀을 뿐인데 여름이 엄청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이번 여름은 수영장에서 보낼 시간이 많아질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