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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lee Jun 18. 2019

식욕과 성욕이 함께 하는 곳

음식남녀

저는 지난 4월 전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벚꽃구경을 하다 왔습니다. 전라도 여행은 19년 만에 처음인데... 미국에 들어가던 해인 2000년 봄에 변산반도 일대를 여행했던 경험이 전부입니다. 아! 또 있네요. 대학교 1학년 때 민요와 설화 채집하러 구례 지역을 답사하기도 했고 어이쿠... 글을 쓰려고 기억을 더듬다 보니 대학교 2학년 때에는 전남 강진으로 농활(농촌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했었습니다. 3학년 여름에는 지리산 종주에 도전했다가 연하천에서 뻗어서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오기도 했었네요... (흠... 생각보다 많이 돌아다녔군...) 


학생 때 단체 여행이니 지금 기억나는 것들은 기억 속의 이미지 몇 장으로 남아있을 뿐이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떠났던 변산반도 일대 여행은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부안 채석강에서는 바닷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해를 보았고, 초록 잎들 사이로 빨간 꽃망울들이 일제히 머리 내밀고 있는 고창 선운사의 동백꽃도 보았죠. 내소사를 거쳐 김제 벽골제 단아로의 파릇파릇 올라오는 잔디도 밟고... 기대하지 않고 떠났던 여행길에서 뜻하지 않게 부린 눈 호사가 근 20년이 다 됐는데도 참 좋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떠난 한국 여행지가 바로 전남이었습니다. 담양 소쇄원을 시작으로 화순의 화순적벽, 광주 금남로와 보성의 대한다원, 소설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 낙안읍성, 순천 갈대밭 습지에 이르기까지 보고 싶은 곳 차곡차곡 챙겨가며 돌아다녔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수첩에 적어가며 한국 땅을 여행하게 된 동기는 지난해 방송된 '알쓸신잡' 때문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는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 이렇게도 내가 안 가본 곳이 많구나... 그리고는 갈 데가 없다며 해외로만 돌아다녔다는 것을 말이죠. 이렇게 해서 전남 여행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여행이라는 게 눈요기를 하러 떠나는 길이라지만 일상의 맛에만 길들여진 혀에 새로운 미각을 선사하는 것도 큰 기쁨 중의 하나죠.  오랜만에 전라도의 갖은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회는 물론이고요... 구운 가리비를 안주 삼아 소주 한잔도 걸쳤습니다. 딱딱해서 제대로 씹을 수 없을 만큼 해삼도 싱싱했고 담양의 떡갈비와 대나무통밥, 벌교 꼬막 찜까지... 계속하다간 아무래도 여러분들의 입맛을 제가 버려놓을 것 같군요.  


저는 먹는 걸 무지하게 밝힙니다. 같은 돈을 주고 이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게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죠. 그래서 제가 먹는 거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이 만만치 않습니다. 대신 다른 비용을 아껴야 하겠죠. 예를 들면 옷이나 화장품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아껴야 한다기보다 그런 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죠.


음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제가 요리 진행을 했던 잡지사의 생활 기자 출신이라고 말씀드렸던가요? 안 했던가요... 요리는 남보다 좀 안다고 생각하고 또 미각 좋은 사람이 손맛도 좋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요즘은 통 음식을 할 일이 없네요. 솜씨가 많이 녹슬었습니다. 그래도 예전에 했던 가락이 있어 영화를 보면 음식을 만드는 장면은 누구보다 유심히 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게 먹는 장면이고 어느 영화든지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몇 번씩 나오기 때문에 저는 실제 생활의 음식만큼 영화 속 음식에 관심이 많은데 사실 스크린 속의 요리보다는 주인공들의 현란한 칼 솜씨를 부러워합니다. 좀 특이한가요? 영화 속 요리야 맛을 볼 수 없으니 대신 주인공들이 휘둘러대는 칼 솜씨 장면을 턱빼고 보는 편이죠. 


제가 칼 솜씨가 좀 서툴거든요. 혹시 '롱키스 굿 나이트'이란 영화 보셨나요? 기억상실증에 걸린 전직 킬러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지나 데이비스가 음식을 하면서 요리사로서의 칼솜씨가 아니라 킬러로서의 칼솜씨를 뽐내던 영화입니다. 하여간 이 영화에서의 칼 솜씨는 어휴~ 예술입니다. 주방에서 칼로 식재료를 손질하는 전직 킬러... 주방용 칼이 날라다닙니다. 폭소가 터지죠. 재미있게 킬링 타임용으로 볼만한 영화입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칼 솜씨에 입이 딱 벌어졌던 영화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음식남녀'입니다. 보신 분 많죠. 일류 호텔의 셰프였지만 미각이 죽어 은퇴를 하고 세 딸의 뒤치다꺼리에 날 새던 홀아비 생각나세요? 이 영화를 보면서 저거 촬영할 때 꽤나 힘들었겠군... 촬영 스태프들의 애로까지 생각하며 혼자 낄낄낄...


왜냐고요? 잡지나 책에서 요리를 촬영할 때 사진에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사진기자들 옆에서 무릎을 꿇고 음식에서 김이 폴폴 나도록 팔이 아프게 부채를 부쳐대던 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죠. 촬영 시간이 오래 걸려 음식 표면이 드라이해지면 식용유를 발라 지금 막 만든 것처럼 변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더 심하겠죠?. 식었으면 다시 데워라, 김이 모락모락 나게 해라 얼마나 주문이 많았을까,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합니다. 제가 일 할 때는 스튜디오에서 음식을 먹으며, 촬영하며, 가끔은 반주도 곁들이면서 그렇게 일을 하곤 했습니다. 온종일 요리 촬영을 하고 퇴근을 한 날에는 집에 가서 음식을 쳐다보기 싫을 때가 많았죠.  


 '음식남녀'의 감독, 이안은 영화감상이 일천한 제가 저와 정서가 참 맞는다라고 생각하는 감독 중의 하나죠. '음식남녀'는 이안 감독의 초창기 작품인데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은 할리우드에 진출한 아시안 중 크게 성공한 몇 안되는 감독입니다. 예전에 '센스&센서빌리티'라는 영화를 보고 감독의 그 섬세한 감성의 떨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주옥같은 대사가 많았는데 그 중 당시 제 가슴을 후벼 파는 대사가 있어 소개합니다. 


 '누구의 손이 닿기만 하면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 대사를 듣고 벌건 대낮, 껌껌한 극장 안에서 흐느끼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밥 먹는 것 대신 회사를 빠져나와 점심을 거르고 보던 영화였죠. 제가 그렇게 영화광이 아닌데...  그때는 정말 영화 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녁에는 집에 일찍 들어가서 아이를 길러야 했기 때문에 제 개인 시간은 꿈도 못 꾸었죠. 그런데 이런 미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더라고요.   


'센스&센서빌리티'는 '96년도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공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이 감독을 알게 됐는데 이후 이안 감독의 영화를 찾아서 보게 됐습니다. 이안 감독 영화 중에 또 제 정서와 맞는 영화가 있는데 혹시 '아이스 스톰'이란 영화 보셨나요?


 '아이스 스톰'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을 때 당시  PC통신 상에서 스와핑 그룹이 적발된 때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흥행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본 영화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그다지 없군요. 제 영화 감상 코드가 좀 독특한가요?

Photo BY Paris Premiere

'아이스 스톰'은 제가 전에 '달콤한 행복의 다른 이름, 속물근성'이란 이름으로 썼던 '아메리칸 뷰티'와 다소 비슷한 성향의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각각 은밀한 짝을 만나는 것도 성이 안 차, 부부 교환 섹스 파티인 일명 키 파티(여자가 유리병에 든 자동차 키를 꺼내면 그 열쇠의 주인공인 남자와 파트너가 되어 밖으로 나가는 파티)를 벌입니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혐오하면서 일탈의 길로 들어섭니다. 현대 사회에서 균열되고 해체되는 가족의 모습을 드라이하게 묘사하고 있는 영화죠. 너무 객관적인 시각이라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말이죠.  한데  '음식남녀'는 이안 감독의 영화이지만 가족의 해체보다는 가족의 재결합, 재발견이란 관점에서 해석할만합니다. 게다가 온갖 종류의 산해진미가 등장하는 통에 눈이 호강한 참 재미있는 영화였습니다. 

Photo by IMDb

'음식남녀'는 유명 호텔 요리사로 퇴직한 아버지와 세 딸의 이야기입니다. 은퇴한 요리사인 아버지는 예전 습관처럼 매주 일요일 호텔 연회상 차림의 만찬을 만들어 세 딸을 초대합니다. 일류 호텔 만찬을 앞에 둔 딸들은 의무적으로 음식을 먹습니다. 


딸들은 아버지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리를 만들고 단 네 명이 먹을 한 끼 식사임에도 엄청난 양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늘 불만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의기소침해질까 봐 드러내 놓고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이 오래된 집에서 탈출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봅니다. 특히 커리어우먼인 둘째 딸은 사사건건 아버지와 신경전을 벌이며 독립할 기회만을 노리죠. 하지만 마음 씀씀이가 제일 깊은 건 이 둘째 딸입니다. 아버지 처럼 요리사가 되고 싶었지만 힘든 직업보다 다른 길을 선택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던 관계로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큰 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자신이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성장하여 동생들과  자매들이 가질 수 있는 친근함은 없고 마치 잔소리만 하는 엄마처럼 지냅니다. 큰딸은 홀아버지에 대한 의무감과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이 결혼을 포기했다는 억울함을 표현하지 못한 채, 생기 없게 말라갑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볼 때 적당하게 둘러대기 위해 첫사랑의 상처로 결혼을 거부하는 것처럼 해보지도 않았던 첫사랑의 상처를 연기하기까지 합니다. 

Photo by IMDb


딸들도 이해할 만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해도 옛것을 고집하며 매주 일요일 만찬에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 아버지 요리 솜씨에 찬사를 보내야 하는 일상의 생활... 갑갑하고 불편하겠지요. 이 일요일 만찬 때문에 노처녀인 큰딸은 데이트 신청을 받아도 흔쾌히 가겠다는 대답을 못하니 왜 안 그렇겠습니까? 큰딸에게도 뒤늦게 사랑이 찾아옵니다. 학생들이 장난으로 보낸 연애편지로 인해 엮이긴 했지만, 자신의 히스테릭한 감정에 굴복하며 마침내 사랑을 이루어냅니다.


이 영화가 참 의미심장했던 건 음식이라는 코드를 가지고 남녀 간의 사랑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본 것에 있지 않나 싶네요. '음식남녀'는 아마도 은유적으로 식욕과 성욕을 상징하는 두 가지의 단어 조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 주 선생은 친구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툭 던지죠. '음식남녀라... 식욕과 성욕은 사람들의 본성이야'. 식욕과 성욕을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건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이라는 테두리 아닐까요? 


그래서 유독 이안 감독의 작품에서 화두로 등장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해체와 복원이라는 주제가 이 작품에서는 음식을 매개체로 한 저녁 가족 모임으로 상징되는 거겠죠. 


세 딸들과 함께 하는 가족 모임은 늘 뭔가 이가 빠진 듯한 공허함과 상실감, 불완전함을 느끼게 합니다. 완전한 가족의 모습이 아닌 삐거덕거리는 균열을 보이죠. 여기에 성욕을 상징하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으로 새엄마가 등장하면서 이 영화는 음식남녀, 즉 식욕과 성욕이 모두 충족된 가족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Photo by IMDb


물론 이 과정에서 이안 감독 특유의 중국식 썰렁한(?) 코미디도 등장합니다. 결혼을 발표하는 저녁 만찬에서 딸들에게 던진 은퇴한 요리사 주사부의 말은 이안 감독이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화두인 듯싶습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각자 사생활을 지켜줘야 한다. 다만 서로에게 관심은 가져주는 게 가족이란 존재의 의의다' 하지만 이 말이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 일이라는 거 다 아실 겁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한 집에 살면 서로 간섭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국 정서에서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툭툭 내뱉어도 되고, 가부장적인 사고에 찌든 가장은 다른 구성원에 대한 배려 없이 나만 편하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입니다. 상대방의 가슴을 후벼 파며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가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공허하고 아프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이이니까 따뜻하게... 보다 친밀하게... 감정의 교류를 나누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제가 너무 얻기 힘든 소망을 갖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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