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글 글보다 말

by 말글손

누구나 자신의 뇌 속에 떠도는 생각을 세상에 내뱉을 권리는 있다. 그 표현 방식이 그림이든 행동이든 소리든 문자든 무엇인들 어떠리.

그런데 통상 흔적이 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살펴보면.

하긴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이 무엇이랴. 소리도 몸짓도 상대에게 아련한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림이나 글도 흔적은 남지만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다를 뿐인데.


오늘도 철수는 영희를 만났다. 그는 늘 주변의 자질구레한 일에도 신경을 썼다. 그렇다고 특별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지나간 일은 흘러간 대로 내버려 두자는 주의였다.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 털어내지도 않았다. 영희는 소소한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일상의 작은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폭풍 잔소리를 쏟아냈다. 말 그대로 잔소리였다. 그렇다고 굳이 마음에 숨겨두지도 않았다. 서로 닮은 듯 다른 둘은 가끔 만났는데 요즘 들어 만남이 잦았다. 세상일이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철수는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챙기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며칠간 밀린 서류 작업을 마쳐야 했다. 오후엔 회의가 잡혀있었다. 현장에서 뛰는 일에 관심이 많은 철수는 서류를 만지작거리는 게 제일 힘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직접 풀어내는 게 좋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류 제출 건이 많아지면서 일과 외에도 노트북과 씨름해야 했다. 오전 서류 작업을 마치고 아이디어를 내 공모에 접수하고 국수 한 그릇으로 아침과 점심을 때웠다. 갑자기 몰려든 한기와 배부름에 낮잠은 청하고 부스스 일어나 두 건의 회의를 위해 길을 나섰다. 그 사이 문자와 카톡과 전화는 불이 나게 울렸다. 첫 미팅은 가볍게 원활하게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군수가 참여한다는 현장도 예측을 잘한 듯 만족했다. 세상이 이렇게만 착착 돌아간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회의 참석차 이동하다 친구 가게에 들러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사는 이야기가 다들 고만고만하니 안도가 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인연이 있는 사무실에 인사차 갔는데 처장이 없어 새로 오신 직원과 인사만 하고 왔다. 공교롭게도 같은 건물의 1층, 2층, 3층으로 적과의 동침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공간이었다. 두 번째 회의가 길어지는 듯하자 철수는 재빨리 나서 회의 진행을 정리했다. 까딱하다간 밤을 셀 요량이었다. 정리는 빠를수록 좋다. 머리도 멍하고 눈도 침침하고 배도 출출하니 빨리 가고 싶었다. 아이들은 각자 제 나름대로 논다고 바빴다. 그렇게 남자는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다시 남자가 되어간다. 라면 한 그릇 먹고 나니 슬그머니 영희 생각이 났다.

뭐하냐?

일하지.

안 마치나?

조금 더.

그래.

철수는 영희를 기다렸다. 뭔 짓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멍하지 차에 앉아 시간만 보냈다.

왔나?

응.

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변수가 생겼어.

뭔데?

일요일에 어디 봉사를 가야 될 판인데.

어디에?

누가 갑자기 부탁해서.

누가?

아는 사람이.

몇 시?

열 시까지?

되겠나?

안 되겠지.

그럼 안 가면?

안 가면 되지.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잘 가라.

가라.

오늘도 철수는 영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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