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여자의 막내, 네 남자의 막내
삶의 방식이 서로 같진 않더라도 닮은 구석은 있게 마련이다. 특별하거나, 유별나진 않아도 제 나름의 방식을 조금씩 맞추면 서로 조각이 맞아 들어간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게 세상의 이치겠다.
아내는 딸만 넷인 집의 막내이고, 나는 아들이 넷인 집안의 막내이다.(우리 집에는 아들 다섯, 딸 한 명인데, 큰 형님은 돌아가셔 네 남자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아내는 도시에서 성장했고, 나는 시골에서 성장했다.
아내와 나는 우연한 만남으로 서로의 인연은 이어졌고, 4년 정도를 만났다. 일반적인 직장인을 사위로 바라시던 장모님이 프리랜서인 나를 달갑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 사이 나는 청소년기 꿈이었던 선생이 되길 마음먹고 학원을 시작했다. 사교육도 교육은 교육이니, 제대로 된 교육 활동을 하고 싶었다. 성적 중심이 아닌 배움과 활동 중심의 수업을 진행하는 학원은 부모님들께 환영받진 못했다. 하지만 신념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본가에서는 결혼은 나의 선택이라며 다른 질문은 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먹고 살건 지 걱정을 빼고 말이다. 처가의 허락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프리랜서도 학원 운영도 환영받는 상황은 아니었다. 안정적인 직장인을 바라는 어른들이 마음이 쉬이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은 나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허락을 받고 결혼생활은 시작되었다. 처가 인근 주택에 전월세로 살림을 시작했다. 아내는 인근 병원에서 3교대 근무를 했고, 나 역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학원 운영은 쉽지 않았다. 전월세는 월세가 되고 말았고, 학원 보증금도 다 까먹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극한으로 겪던 어느 날, 아내에게 임신이란 말을 들었다.
그간의 생활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생겼다. 아버지란 이름을 얻게 되면서 힘도 나면서도 무거운 짐이 어깨를 눌렀다. 작은 학원에 취직을 했고, 아들이 태어났다. 3교대 근무를 하던 아내의 빈자리를 대신해 나는 육아를 담당했다. 물론 딱히 정해놓은 역할을 구분하진 않았다. 서로 동시에 일을 해야 할 때는, 아랫집에 사는 누님께 부탁을 드렸다. 아내가 야간 근무면 아들과 나는 긴 밤을 함께 지냈다. 아침에는 아이와 퇴근하는 엄마를 마중 가는 게 일상이었다. 삼년이 지나고,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가 태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 장인과 장모님이 거의 동시에 쓰러지셨다. 장인은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장모님은 중풍을 진단받으셨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골 어머님은 당시 어느 정도 건강하셨기에, 나는 처가에 들어가 어른들을 모시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아마 태어나서 아내에게 가장 잘한 말이지 않나 싶다. 어르신을 모시는 일은 특별히 힘들지 않았다. 식사를 차리고, 대변을 받아내고,(가끔 장인께서 변을 보지 못하면 파내는 일이야 수고롭지 않았다.)목욕을 시켜드리는 일 따위는 괜찮았다. 위급한 상황에 장인을 업고 응급실로 가야하는 경우에는 일을 하다가도 급하게 집으로 달려와야 했다. 장인 어르신은 그렇게 우리와 이별을 하셨다.
그런 일들이 힘들진 않았지만, 아버지로, 남편으로 경제적으로 수입이 넉넉하지 못해 미안했다. 하지만, 아내는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학원을 하면서 진 빚도 서로 아끼고 살며 조금씩 갚아나가면서 서로 남여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서로 자신이 조금 더 잘하는 쪽으로 일을 맡아서 진행했다. 아이들 교육에 관련되어서는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집안일은 시간이 되는 사람이 우선 알아서 했다. 밥을 해먹고 치우는 일도 자취생활을 오래한 내게는 부담되는 일은 아니었다. 된장을 담그나, 김장을 하는 일은 아내의 주도하에 두 아들과 함께 모두가 발 벗고 나서 함께 한다.(물론 요즘은 중,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도 조금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
양가에 두 어머님만 계시니, 명절이 걱정인 건 틀림없다. 처가의 제사도 신경을 쓰야하고, 본가의 제사도 신경을 써야한다. 결론은 쉬웠다. 처가의 명절은 처형과 아내가 돌아가면서 당번을 정해 준비를 했다. 아내는 여전히 근무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아내가 못 오는 명절에는 우리 집 네 형제가 모여 명절 음식을 하고, 제사 준비를 한다. 장을 보는 일이야 아무나 시간되면 먼저 보고, 각자가 알아서 적절한 음식과 과일을 챙겨온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또한 서로에게 바라는 마음을 비우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오히려 형제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함께 하지 못하는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시골 어머님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셨는지 치매가 왔다. 홀로 계시는 어머님이 걱정이라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매주 찾아뵙고는 있지만, 어머님은 우리가 다녀간 기억조차 점점 빨리 잊어 가신다. 장모님과 일 년에 한 번 정도 함께 모여 맥주도 한 잔 기울이고, 가까운 곳에 잠시 나들이라도 가지만, 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걱정이 한 가득이다. 아내와 두 아들은 매일 시골로 전화를 드리는 게 그들의 일상이다. 나도 매일 전화를 드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꼭 찾아뵙는다. 아내도 시간이 나면 잠시라도 들러 인사를 드린다. 남녀라서 그 역할에 구분이 있을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에 할 뿐이다.
일상의 가사는 아내와 나, 나와 아이들, 나와 장모님, 아내와 아이들이 하는 일에 구분은 없다. 할머니가 잘 아는 일은 할머니가 주도하고 아이들과 내가 함께 한다. 내가 집에 일찍 오는 날에는 저녁 준비는 거의 나의 차지다. 나는 나름대로의 맛을 식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시골에 가면 식사는 늘 나의 차지다. 어머님이 치매를 앓은 이후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 동안 어머님 사랑을 먹고 살았으니, 이제는 어머님께 맛은 몰라도 아들이 차려드리는 식사 한 끼라도 보답하고 싶을 뿐이다.
처가의 네 자매는 늘 함께 잘 지낸다. 하지만 집집마다 사정이 다르니 그 사정을 다 쓸 수도 없다. 본가의 네 형제와 한 자매도 늘 잘 지낸다. 하지만 집집마다 사정이 다르니 그 사정을 다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 네 형제와 아내의 네 자매는 그렇게 서로 살아온 환경이 확연하게 다르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습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시간에 따라, 역량과 능력에 따라 하는 일이 조금씩 다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뭔가를 바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서로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늘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다. 또한 서로의 인생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도움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서로의 마음을 다독거릴 뿐, 서로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툼을 풀어나가며, 다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하면서 지금처럼 행복한 모습을 아이들에게 전하려고 한다. 잘 살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우리도 힘들고 어렵다. 모든 삶이 말처럼 쉽진 않다. 우리도 그렇다. 하지만 일상에서 서로 사는 모습이 다를지언정, 서로 사는 목적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너는 남자, 나는 여자. 나는 여자, 너는 남자. 이런 구분만 없어도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집성촌에서 성장하면서 높은 촌수로 동네에서 어른 대접을 받던 꼬마와 도시에서 소중한 딸로 애지중지 성장한 꼬마의 삶은 서로 다르지만 결국에는 닮아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