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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의 재조명 공간, 기억을 잇다

진해의 향기 ,사람으로 남다

by 말글손

진해의 향기, 사람으로 남다

장진석 구술채록원

- 이야기 속 장소 -

송학동 근대상가주택

태백여인숙

창선동 근대상가주택

진해의 향기, 사람으로 남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겨울 햇살은 따뜻했다. 창밖에는 휑한 겨울바람이 불었지만, 유리창 안은 난로의 열기와 차의 향기가 어우러졌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세월의 흔적을 안은 나무가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무너지진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2층 건물을 100년이 넘게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세월이 얼마나 되었을까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할아버지, 밖은 추운데 여기는 따뜻해요.”

10대 후반쯤의 소녀는 긴 머리를 흘리며 찻잔을 만졌다.

“그래. 밖에는 찬바람이 불어도 이렇게 유리창 안에 앉아있으니 따뜻하구나. 차도 따뜻하고.”

희끗한 머리칼을 쓰다 넘기는 노신사는 햇살에 눈이 부신지 눈을 살짝 감았다.

“그때도 그랬어. 찬바람이 세차게 불긴했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은 따뜻했지.

먹고사는 게 힘에 부치고, 자유의지를 빼앗기긴 했지만 말이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말이 쉽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은 할아버지를 방해하긴 싫었다. 고희(古稀)를 맞은 노인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전해지던 옛 진해의 이야기를 더듬어가는 듯했다. 한 국가의 역사와 한 도시의 역사는 남겨진 것이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한마을의 역사나 한 시민의 역사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금세 잊히는 법이다. 그런 여느 도시와 시민의 이야기처럼 진해도 다를 바가 없었다. 3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진해의 모습은 당시의 모습과는 완연하게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해의 *충무지구(11개 법정동으로 신흥동, 송죽동, 대천동, 부흥동, 근화동, 수송동, 회현동, 익선동, 창선동, 통신동, 중앙동)가 불리는 여좌동, 충무동, 화천동, 송학동, 대흥동, 대천동, 통신동, 창선동, 중앙동, 중평동(*근대문화유산 건물이 있는 현재 주소)에서 백여 년 전의 흔적을 살피는 일이 쉽진 않았다. 충무지구에 이렇게 많은 동(洞)이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흘려듣는 게 전부였던 시기였지만, 여전히 추억은 아련하기 마련이다.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길은 근대 도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여전히 세월을 뒤로하고 그때에 머물러 있는 공간과 그때의 때를 벗고 있는 공간으로 조금씩 변화를 느낄 뿐이었다. 유년기의 기억은 어느 특정 시점의 특정 공간에 제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년기에는 아무것도 몰라 진해를 몰랐고, 어른이 되어서는 먹고 사느라 진해를 알 여유가 없었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 그리고 노년이 되어서야 고향 진해를 다시 생각해 보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잠시 창밖을 보던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저 진해역에 좀 다녀올게요. 엄마, 아빠 올 때가 다 되어가요.”

할아버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소녀는 송학 커피점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잘 정돈된 거리는 한산했다. 진해역을 향해 걷는 소녀는 하얀 입김을 내면서도 콧노래를 불렀다. 할아버지 고향에 처음 와본 소녀는 설렘이 가득했 다. 할아버지가 태어났다는 경화동에 도착했을 때는 그냥 작은 도시의 작은 마을에 온 기분이었다. 할아버지와 경화역을 천천히 걸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벚나무가 철길과 동행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뉴스에서 간간이 나오는 진해 군항제의 모습이 겹쳤다.

사진1> 송학동 현재 모습

CNN에서도 극찬한 아름다운 봄의 경치를 상상했다. 2006년 이후로 모든 열차가 운행 중지되었지만, 진해 군항제를 할 때만 잠깐 열차가 운행된다고 하니, 봄의 여신이 흩날리는 벚꽃과 열차가 빚어내는 진풍경은 ‘겨울 왕국’의 눈꽃보다 화려할 것이라 상상하니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경화역을 거쳐, 과거 진해의 번화가였다는 곳에 오니 자신도 모르게 낯선 이질감과 묘한 동질감이 동시에 번졌다. 진해역에 도착하니 부모님도 시간 맞춰 도착하셨다.

“아빠. 할아버지는 지금 깊은 회상에 빠진 듯해요. 그래서 조용히 옛 생각 하시라고 나왔지요.” 환하게 웃는 딸의 모습에 아버지와 어머니도 빙그레 웃었다.

“그래. 잘 했네. 눈치가 제법인데.” 엄마는 눈을 찡그리며 딸의 팔짱을 꼈다.

“가보자.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

“엄마. 아까 할아버지랑 경화역을 산책했는데, 너무 좋았어. 난 너무 좋은데, 할아버진 조금 씁쓸하신 듯 보였어. 고향이라고 하더니.”

“그러시겠지. 나도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지만,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예전에 지금 여기 이 근처가 고향이라고 하시더라. 일본이 군항을 만들면서 중원로터리, 북원로터리, 남원로터리를 중심으로 계획도시를 건설하고,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 자자손손 살던 이곳 11개 마을의 사람들을 강제로 내쫓았다더구나. 어쩔 수 없이 쫓겨난 조상들이 모여 살던 곳이 경화동이라고 했지. 아마 할아버지는 네 증조부를 떠올리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고향이 그리운 곳은 틀림없는데, 언제나 포근한 곳만은 아닐 수도 있겠네.’ 소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봤다. 파란 겨울 하늘을 보니 눈이 시렸다.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요.” 소녀는 엄마를 보챘다.

노신사는 여전히 송학 커피점에 앉아 창밖을 응시했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주인장을 불렀다.

“주인장, 미안하지만, 펜과 종이를 좀 줄 수 있겠소?” 잠시 천장을 받치고 있는 목조구조물을 응시하더니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창원, 마산, 거제, 진해만 일대의 요지를 강점하고 군사 기지를 설치하여 러일전쟁에서 이겼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 일제는 간악한 머리를 쓰고 있었다. 한편 대륙 진출을 위한 야욕으로 한반도에 군항을 건설할 계획까지 철저하게 세웠다. 치밀한 조사 작업을 진행한 끝에 웅천군[현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과 거제도, 진해군[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등에 해군기지를 세울 요량이었다. 결국 1906년 8월 진해만 일대를 군항 지역으로 고시했다. 현지 조사 후 우리 민족의 땅을 헐값에 매수를 하여 1907년 10월 진해만 시설 조사 위원을 임명하는 등 군항 건설을 시작했다. 웅천군(진해) 일대와 거제도 일부를 포함한 약 1,300만 평이나 되는 우리의 국토가 일제의 손아래 놓이게 되었다. 1909년 6월부터 측량을 시작하면서 군항이 들어설 지역(진해 충무지구)의 한국인 부락을 강제 철거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군항 건설은 1910년 4월 임시 해군 건축부 지부를 설치하고, 6월에 시가 예정지를 측량하고 도로와 하수도 공사를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1910년 우리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는 거침없는 수탈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행정, 입법, 사법 및 군대까지 손에 쥐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 이제 진해를 군항으로 만드는 일은 아무런 거리낌조차 없었다. 진해를 군사도시로 개발을 하면서 당시에 ‘중편 한들’로 불리던 들판에 8거리 중원 로터리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북원로터리를, 남쪽으로는 남원로터리를 방사 직교형으로 만들었다. 주요 도로 주변으로는 진해 도시계획에 의해 하나의 지붕 아래 여러 가구가 늘어선 형태의 장옥(長屋 : 나가야)로 지었다. 도로변 주택은 토지의 효율성(도로 이면의 어두운 면을 감추거나, 토지를 일본인에게 비싸게 분양하기 위해)을 위해 2층 이상이 되어야 허가를 내어주었다. 또한 1층은 상가, 2층은 일본 전통식 장옥(長屋:나가야)만 허가했다. 1층은 상점으로 이용되었고, 2층은 4가구 정도가 한 지붕 아래서 거주했다고 한다. 1911년 1월에는 일본 정부가 진해만에 건설되는 군항을 일본 해군 제5 해군구의 군항으로 확정했고 한반도 부근 해역을 담당시켰다. 1914년까지 ‘진해 진수부(鎭海 鎭守府)’라는 이름의 해군 기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군항 건설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군항을 보호하기 위해 마산포의 개항장을 폐지하여 허가받지 않은 선박의 통행을 제한했다. 1912년 4월에는 청사와 부두 시설이 일부 완성되자 거제도 송진포에 있던 해군 방비대도 이전시켰다. 군항 건설 공사가 진행되던 시기에 지명도 본래의 웅천에서 ‘진해’로 바뀌었다. 즉 1912년 1월 당시 마산부에 속했던 웅중면 전부 와 웅서면의 일부를 통합하여 ‘진해면’으로 했다. 1914년에는 마산부에서 창원군이 다시 분리됨에 따라 진해면은 창원군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1916년 3월 진해의 군항을 요항[당시 일본 해군의 규정상 군사상 경비를 요하는 항구로 군항 아래 등급]으로 지정하고 4월에 진해 요항부(要港部)를 개청하였다. ‘진수부’로 하기로 했던 해군 기지의 이름을 ‘요항부’로 바꾼 것이다. 1922년 3월 마침내 진해의 군항 설치 공사를 완료하고 1923년 3월 일본 제3 해군구의 요항으로 확정되었다.』

“할아버지, 뭘 그리 열심히 적으세요?”

“그동안 자료를 좀 찾아보면서 공부한 것을 적어봤다. 한번 읽어볼래?” 노신사는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글자가 빼곡한 종이를 손녀에게 건넸다.

“왔어? 먼 길 운전해 오느라고 고생했다. 차 한 잔하고, 여길 한번 둘러보자꾸나.”

“네, 아버님. 기다리시느라 지루하셨죠?” 아들 부부는 차를 주문하고 의자에 앉아 조용한 커피점 내부를 돌아보았다.

“진해는 건물들이 다들 특이하네요. 여기 카페도 내부 구조가 옛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저 카페 좀 둘러볼게요.”

며느리도 처음 보는 낯선 건물의 외형과 과거의 흔적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실내장식은 오밀조밀하고, 카페 내부는 오래된 나무 향이 풍기는 듯하다. 카페 안의 작은 문을 열고 나가자 작은 공간이 또 나왔다. 공간 밖에는 조그마한 정원이 눈길을 끈다. 정원을 지나니 별채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독특한 창문도 눈길을 잡는다. 별채에는 바닥에 앉아 차를 즐길 수 있는 방이 있다. 1층을 다 돌아보고, 2층으로 올랐다. 2층으로 오르는 데 오래된 건물이라 괜찮을까 하는 고민도 살짝 되었다. 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흔들의자도 마음에 든다. 야외 공간은 벚꽃이 날리는 봄날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창문 밖에는 그때 당시의 나무 난간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현대와 과거의 이중적 감성을 키워주고 있다. 2층에서 내려오자 눈길을 잡는 오래된 종이가 액자 안에 담겼다. 부채 문양이 새겨진 이 종이는 일본 벽지라고 한다. 그때와 지금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송학 커피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손님이 없어 다소 쓸쓸한 모습이지만, 봄이 되면 꽤 많은 사람이 찾을 것이다. 해마다 진해군항제 기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진해를 찾는다. 과거의 모습을 잘 유지하면서도 현재의 소비유형과 맞는 카페이다. 차 한 잔의 향기와 추억을 나누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당신도 한번 돌아봐요. 아버님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공간일지도 모르잖아요.” 며느리는 살짝 들떠 있었다.

“아이쿠. 됐네요. 차 한 잔 마시면 되지, 뭘. 당신은 이곳이 마음에 드나 본데?” 시큰둥한 아들의 반응에 며느리는 눈을 흘겼다.

“여기 너무 좋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벚꽃이 날리는 봄에 꼭 와보고 싶어요.” 며느리는 토라진 듯 뾰로통한 말로 대꾸했다.

“그래, 한번 오자. 봄이 오면, 벚꽃이 날리는 봄이 오면 꼭 오자.” 노신사는 아들을 보면서 살짝 웃음을 지었다.

“네. 아버지. 봄에 한번 오시죠.” 아들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신사의 메모지를 한참을 읽고 또 읽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그렇게 고향에서 쫓겨나고, 일본인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삶을 이어가셨구나.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도 다들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바치며 일군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어. 한 번쯤은 진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이제 일어나 볼까? 천천히 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봐야겠다.” 노신사가 일어나자 며느리가 서둘러 목도리를 챙겼다.

“아버님, 바람이 차니 목도리를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 다들 따뜻하게 챙겨 입고 나가보자.”

“아버지. 그냥 차를 타고 드라이브 삼아서 돌아보시죠?” 아들은 따뜻한 카페 안이 좋은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시의 공간은 걸어야 맛이지. 그리 많이 걷진 않으니 잠시 걸어보자. 참. 네가 주차한 진해역 바로 옆에 있는 여인숙부터 한번 가봐야겠다. 그때 그 아주머니는 그대로 계신지……. 그 여인숙 이름이 뭐더라? 여하튼 가보자.” 한산한 거리를 걷는 노신사의 발걸음은 힘찼다. 뭔가 모를 기운이 샘솟는 듯 보였다.

“그래, 여기네. 여기. 이제는 간판도 없구나. 여기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저 집 말이다. 예전에 이곳이 여인숙이었지. 그래. 생각이나. ‘태백 여인숙’ 20, 30대 시절에 제법 들락거렸던 곳이기도 하지. 고향을 떠난 친구들이 고향에 오면 묵었던 그곳이야. 한번 들어가 볼까?”

“아버님.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개인 가정집 같은데 들어가도 될까요?” 며느리는 못내 걱정스러운 듯했다.

“예의를 갖추면 되지.” 노신사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십니까?” 노신사의 부름에도 집안은 고요했다. 그 사이 소녀는 스마트 폰으로 [태백 여인숙]을 검색했다.

“아버지는 여인숙에서 주무실 일이 없었을 건데 그러세요?”

“아니다. 여긴 해군의 도시 아니냐? 진해역은 수많은 해군과 해군 가족이 오가는 만남의 장소이자 이별의 장소였어. 또 한국전쟁 당시부터 적색분자를 잡는다는 명목 하에 시행된 야간 통금이 1982년까지 근 30년 이상이나 있었지. 그러다 보니, 멀리서 오는 해군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진해에서 잠을 자야 했어. 자연스레 진해역 인근에는 여인숙이 많이 생겼고. 덕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으면 근처 대포집에서 회포도 풀고, 여인숙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기도 했지. 그땐 그러기도 했지. 저기 옆에 있는 삼오장 여관도 내 기억에는 60년도 더 된 건물 인상 싶구나. 60, 70, 80년대에는 진해가 엄청나게 경제적으로 성장했지. 그래서 객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벚꽃이 필 때면 군항제를 즐기러 오는 수많은 인파 덕에 여인숙 역시 호황기였지. 지금은 이렇게 오래된 도시의 중심이 되고, 사람들은 인근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서는 신도시로 떠나지만 말이다.” 그때야 오래된 여닫이문을 열고 하얀 머리칼의 할머니 한 분이 나왔다.

“누구세요?”

“예. 진해가 고향인 사람인데 고향 떠난 지 30년 만에 다시 와봤습니다. 고향이 잘 있나 하고.” 노신사는 나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이소. 뭐 볼 거는 없지만 한번 둘러보이소.” 백발의 할머니가 수줍은 소녀의 웃음을 지으며, 입을 가렸다.

“선생님. 예전부터 여기 여인숙 운영하신 거 맞죠? 그때 모습이 조금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노신사는 두 손을 모으고 마당에 서 있었다. 그때 소녀는 스마트 폰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스마트 폰 화면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이 나왔다.

『구 태백 여인숙 : 분류 국가등록문화재, 기타, 주거 숙박시설/ 2동, 지상 1층/ 연면적 94.91㎡/ 지정(등록) 일 2021.11.04./ 경상남도 창원시/1963년 건립/ 마당을 가운데 두고 객실들이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던 근대기의 숙박시설의 원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시설로서 숙박시설뿐만 아니라 생활공간으로의 특징과 당시 목조주택에 건축적인 특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진해지역의 근대시기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등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진2> 태백여인숙 내 재봉틀

“아니요. 인자 여인숙은 안 해요. 이리 늙어가꼬 무슨. 그래도 나라에서 뭔가 한다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데요. 여기 앉으이소.” 할머니는 마루를 손으로 훔치며 자리를 권했다. 노신사는 조용히 마루에 앉았다.

“바느질하고 계셨나 보네요. 연세도 있으신데 바늘귀에 실도 직접 꿰십니까?” 노신사는 할머니의 반짇고리를 발견하곤 놀라 물었다.

“아, 딸한테 발 닦이 하나 만들어 줄라고예.”

“대단하시네요. 따님도 나이가 있을 건데. 역시 자식들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리지요.” 노신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마당에 서 있는 아들 내외를 바라보았다. 소녀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저 집 조금 둘러봐도 되나요?”

“볼 거는 없는데 둘러 보이소. 저기가 예전에 여인숙 하던 데고, 집 뒤에도 방이 있었는데 인자는 없소.”

소녀는 마당과 집을 다 합쳐도 좀 큰 아파트만큼도 되지 않는 공간을 이용하여 방이 여러 개인 여관을 운영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남아있는 여인숙 건물의 방문을 열었다. 오래된 여닫이 방문은 열린다기보다는 그냥 밀리는 수준이었다. 여러 짐이 빼곡히 찬 방을 보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한 사람이 자기에도 좁은 이 방에 2-3명이 칼잠을 자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뒤로 돌아가니 깨끗하게 비질이 된 좁은 통로 외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할머니께서 집을 얼마나 잘 관리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아주머니 얼굴 뵈니 기억이 가물거리네요. 이제 연세가 어찌 되십니까?” 노신사의 말에 할머니는 다시 수줍은 듯 입술을 가렸다.

“나이를 알아서 뭐 하게요. 내가 89살인가 그런데.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해요. 요새는 사람들이 집 구경한다고 자주 오가는데 서너 명씩 몰려와서는 둘러만 보고 가던데. 손님은 좀 특별하네요. 이것저것 물어보고. 다들 식군가요?”

“예. 아들 내외하고 손녑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와서 한번 돌아봅니다. 예전에

사진3> 태백여인숙 전경

제가 젊었을 때는 한 번씩 여기 태백 여인숙에서 친구들하고 묵기도했는데. 어르신은 안 계신가 봅니다.” 노신사는 방 안을 흘깃 훔치며 말했다.

“한 10여 년 넘었네예. 세상 떠난 지가. 그래도 저 아랫동네 살다가 여기서 여인숙 하면서 6남매 다 키워 시집 장가 보냈으모 됐지요.” 할머니는 여전히 웃음꽃이 만발했다.

“추운데, 방은 따뜻합니까?” 신사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올 가을에 벌시로 기름 2드럼 넣어놨어예. 내도 아파트 살모 좋겠거만, 그래도 여기서 마무리해야 안 되것소. 옛날에 연탄불 뗄 때는 영감이 많이 도와주고 했는데. 인자는 여인숙도 안 하니 편하요.” 할머니의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듣던 신사는 아들을 불러 조용히 말했다.

“어디 가서 빵이라도 조금 사 오너라.”

“아이쿠, 아이요, 무슨. 우리 집에 온 손님은 내가 대접해야지.” 할머니는 힘들게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손수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우고 커피를 탔다.

“아닙니다. 저희 괜찮습니다.” 신사와 아들 내외가 동시에 손을 저었지만, 할머니는 결국 커피를 내어오고 말았다.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이께 내가 대접해야지예.” 할머니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는 참 고우세요.” 며느리의 말에 할머니는 다시 웃었다.

“내 다시 태어나모 여자로 안 태어날끼요. 요새 텔레비전 보니 여자들이 불쌍하데요. 남자들은 지꺼만 챙기고. 그래도 우리 예전에 우리 막내 데리고 시장에 가모 딸보다 엄마가 낫다는 소리 들으모, 딸 보기 미안터라꼬.” 할머니의 말에 모두가 웃음보가 터졌다.

“할머니가 따님보다 더 예뻤을 거 같아요. 할머니는 진해가 고향이세요?” 소녀의 말에 할머니는 손을 저었다.

“아이코, 젊은 아가씨가 그라모 안 돼요. 하긴 예전에 여인숙 손님들이 술을 달라 하기도 하고, 일하는 이 할매를 희롱하기도 했지. 그래도 언제나 남편이 잘 지켜줬는데. 진해 토박이긴 한데, 내가 진해를 잘 몰라요. 어려서는 기억이 잘 안 나고 여인숙 하면서 밤에는 손님들 맞아야 했고, 아침에 손님들 나가면 방 청소하고 이불 정리하고 하루하루 장사를 해야 했으깨나. 여간 고된 일이 아이요. 우리 애들이야 학교를 오가고 했는데, 정작 나는 별로 나가질 못해봤어예.”

소녀는 손가락을 펼쳤다.

‘여인숙 방이 10개라고 치면, 방 하나에 두 명씩 계산하면 하루에 20명, 일 년이면 7,300명. 그렇게 20년을 운영했다고 치면…….’

엄청난 숫자에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태백 여인숙을 지나갔는데, 그 사람들의 기억에 태백 여인숙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아니 기억이라도 하고 있을지조차 궁금해졌다. 하긴 소녀 역시도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어디에서 잠을 잤는지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우리는 공간이라는 곳에 대한 의미를 많이 두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단지 가격이 얼마인지만 궁금할 뿐. 산업화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할머니는 언제부터 여인숙을 운영하셨어요?”

“1970, 몇 년도인가부터 했을 거예요. 내가 한 게 그때부터 지금까지 했으니까. 그전부터 했으니까 정말 긴 시간이지 않을까예.” 할머니의 대답들이 논리에 딱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정정하게 자리를 지키며 집 구경을 오는 손님들을 귀찮아하지 않으시는 걸 보면 여유에 삶의 연륜이 묻어났다.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오가는 손님들의 뒤치다꺼리를 말없이 해내며 6남매를 키워낸 할머니의 삶이 어디 녹녹했을까. 하지만 살아내어야 했기에 뜨내기손님들의 불만과 엉뚱한 요구를 헤쳐 내었기에 지금 이 공간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를 지켜내는 것은 한 개인의 삶이라는 사실을 노신사는 가슴에 새기고 새겼다. 번지르르한 외형적 발전만이 성장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와 한 사람의 역사 또한 진정한 성장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아들이 사 온 빵을 할머니께 드리고, 가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 벚꽃이 필 때 한번 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식사도 잘 챙겨 드시고, 건강하십시오.”

“아이고, 고맙소. 봄에 꽃 피면 또 오이소. 댁 같은 손님들이 오니 참 좋네요. 막내딸이 맨날 오니 잘 지내요. 또 오이소.”

따뜻한 봄바람이 다시 불어오면, 벚꽃이 화려한 봄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때 다시 와서 할머니와 식사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는 손녀의 말에 노신사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할아버지. 이거 한번 보세요.” 손녀는 스마트 폰을 다시 내밀었다.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지 노신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읽어드릴게요.”

『지금의 중원로터리에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당산목, 정자목의 역할을 하던 수령 1,200년 된 팽나무가 있었지만, 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하자 고사했다고 한다. 이후 느티나무를 심었으나 그 역시 고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기름진 논밭을 갈아엎고 휑한 시가지를 건설한 일본은 도시 미화용으로 10만여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 현재 공설운동장 옆 농지에 ‘벚꽃장’이라는 벚꽃 단지를 만들어 관광휴식처로 이용했다. 해마다 ‘앵화단(앵화는 앵두나무꽃)’이란 이름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진해를 찾았고, 1927년 진해역이 개통된 이후에는 벚꽃이 필 때 사람을 태우는 임시열차가 운행하면서 경성, 대구, 부산 등 대도시에서도 관광객이 몰렸다. 물론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할아버지, 벚꽃장이 뭐예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진해 군항제는 많이 들어봤지? 네가 말한 대로 진해 벚꽃은 초기에 일제에 의해 심어졌다. 일본인들이 벚꽃을 좋아한다고 하더구나. 일제 강점기 시대에 진해역을 통해 벚꽃을 구경하러 오던 그런 행사를 벚꽃장이라고 불렀다. 요즘은 벚꽃장이란 말을 쓰면 안 된다는 말도 있더라. 여하튼 일제가 심은 벚꽃은 일제의 잔재라 해서 당시에 심어진 벚꽃나무를 거의 베어버렸데. 그 사이 1952년 4월부터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세우고 추모제를 올렸어. 1960년대 초에 진해의 벚꽃나무가 제주도가 원산지인 왕벚나무라고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인식도 변하기 시작했어. 벚꽃의 아름다운 4월에 충무공 추모제와 더불어 관광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던 당시의 진해시가 우리나라 자생종인 벚나무를 다시 심어 벚꽃의 고장이 된 거지. 그리고 1963년부터 추모제가 군항제로 이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벚꽃장은 과거에 불리던 말이긴 한데, 이런 말도 있단다. ‘난리 벚꽃장. 날리는 벚꽃 잎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군항제 기간에 몰려서 생겨난 말이야.”

사실이었다. 난리 벚꽃장이란 말을 너나없이 쓰던 때가 있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진해군항제를 찾아 봄 잔치를 만끽했다.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레 상인도 많아지는 법. 진해역과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많은 노점들이 즐비했다. 부식 가게 등 생활필수품을 파는 가게와 노점은 물론 찻집, 대포집이 성행했고, 일용잡화나 고물장수, 담배 장수, 곡예나 마술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여좌천의 끝자락에 있는 진해 복개천의 포장마차도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모르지만, 1990년 말까지만 해도 해군과 시민들의 애정을 받는 곳이었다. 1년 장사를 군항제 기간에 다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장사도 잘 되었다. 노신사는 과거 진해를 떠나기 전 생활 터전이었던 진해를 다시 떠올렸다. 잊힌 기억들이 떠오르지 않아 속상하기도 했지만, 간혹 떠오르는 추억 몇 조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아버님. 그럼 우리가 광복을 맞으면서, 일본인들은 다들 돌아갔잖아요. 그럼 일본인들이 살던 집은 어떻게 되었어요?” 역시 부동산에 대한 눈치는 며느리가 빨랐다.

하지만 노신사도 그저 들었던 기억에만 의존해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릴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쫓겨나면서 그들이 살던 집은 하늘에 붕 뜬 상태였다. 무주공산의 시대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허드렛일을 하거나, 글을 좀 아는 사람들이 일본인이 물러난 거리에 들어가 살았다고 했다.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소도시의 일제 잔재까지 다 관리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그러다가 6.25 전쟁이 끝나고 개인에게 불하되었다고 들었을 뿐이었다. 그때 또다시 소녀는 스마트 폰을 꺼내 들었다.

『적산가옥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에 불하된 일본인 소유의 주택. 적산은 적의 재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후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그들이 남겨놓고 간 기업, 토지 그리고 주택을 비롯한 각종 부동산과 동산류를 ‘적산(敵産)’이라고 불렀다. 이 중 일본인들이 소유하던 집을 ‘적산가옥’이라고 부른다. 적산가옥은 군산, 포항, 목포, 부산, 인천 등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였던 항구도시에 많이 남아 있다.』

“결국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 개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는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는 거네요. 그때 할아버지도 여기 집을 하나 받았으면 좋았을 건데. 그럼 고향에 집이 하나 생기는 거잖아요.” 소녀의 투정에 노신사는 웃었다.

“그랬겠구나. 허허. 그랬다면 좋았겠지. 하지만 그땐 이 할아버지도 너무 어렸단다. 네 증조부도 그것까진 생각을 못 하셨겠지. 먹고사는 일이, 자식들 키우는 일이 더 급했을지도 모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장옥 주변으로는 자갈이 많이 깔려있었단다. 물론 비가 오면 진흙탕 길이 되는 것을 막기도 했겠지만,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얼마나 핍박했겠니? 그래서 행여나 누가 자신들을 해치러 들어오면 발걸음 소리를 듣기 위해서 자갈을 깔았다고 하더구나.” 노신사는 혼자 재미난 이야기를 알고 있는 냥 신나게 말했다. 겨울바람이 훅 불어와 거리를 돌아갔지만, 곧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것이란 기대감에 노신사는 느긋한 미소를 띠었다. 한창 공사 중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아픈 역사이지만, 기억해야 할 공간이 많은 곳이네요. 이런 곳들은 개발보다는 보존이 잘 되면 좋겠네요. 그렇다고 무작정 있는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참 어려운 문제긴 하네요.” 아들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렇지. 그래. 쉬운 일은 아니지. 나도 진해에 내려오기 전에 이리저리 정보를 찾아보니 문화재청과 창원시가 근대역사 문화 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에 선정되었다고 하더구나. 2022년부터 5년간 500억을 단계별로 투입해서 근대역사 문화 공간 보전과 정비를 한다고 하니 참 다행스럽다. 이곳에 총 11곳을 국가 등록문화재로 선정했다더라.”


사진4> 화천동 근대상가주택 내부

“500억? 어마어마한 규모네요. 옛것을 지키면서도 앞날을 생각하면서 잘 정비, 유지하려면 꽤나 어려운 작업들이 많겠어요. 저도 진해로 내려와서 살까요? 아버지 고향이기도 하니까.” 아들의 말이 철부지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건물은 지금 한창 공사 중이구나. 보자. 여기가 ‘화천동 근대 상가주택’으로 불리는 곳이네. 1938년경에 건축되었고, 1984년에 이르는 시대적 변화 과정을 가로변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사례라고 하더라.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공유 벽체를 활용한 가로경관을 형성해서 의미가 깊다고 했지. 부재와 창호 등 건축의 구성요소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진해의 근대시기 변화 과정을 잘 드러낸다고 했는데…….”

“아저씨. 여기 공사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어요?” 소녀는 건물 공사를 하는 사람에게 씩씩하게 물음을 던졌다.

“아. 여기요? 여기 예전에 오래된 일본식 건물이라고 하던데, 기본 건물의 목조구조나 뼈대는 보강을 하고 위험한 부분을 보강하면서 과거와 현대가 잘 어우러지게 공사를 진행하고 있어요. 오래된 건물이라 조심스레 손도 많이 가지만 잘 해보겠습니다.” 공사 현장 아저씨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 안을 들여다보니 목조 구조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건물을 제법 튼튼하게 짓긴 했네. 이렇게 오래된 나무 건물이 지금까지 잘 버티는 걸 보면 말이야. 여기에도 1층에는 상가를 하고, 2층에는 사람들이 살았겠지. 나무로 된 건물이라 난방도 하기 힘들었을 건데, 재주도 좋아.’ 소녀는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일본식 목조 건물에 대해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천동 근대 상가주택 바로 옆 건물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노인은 내부가 궁금한지 내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찢겨 나간 벽지에는 낙서가 꽤나 많았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너도 그렇다. 자주 보아야 정든다. 우리도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이원석. 2016년 4. 23”

“내가 새라면 당신에게 날개를 줬을 것이고, 내가 꽃이라면 당신에게 향기를 줬을 것인데, 내가 사람이라서 당신에게 마음 밖에 줄 것이 없다. 2011년 12월 20일 행복하세요.”

사진5> 화천동 근대상가주택 내부 낙서 기록들

수많은 이들의 이름과 서로의 안부를 묻고, 희망을 전하는 글들이 가득 들어찬 어느 대포집의 벽도 허물어지고 이제는 새로운 신식 건물로 태어나니, 좋다고 해야 할지 아쉽다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긴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노신사가 잠시 거리의 벚나무를 잡고 섰다.

“아버님, 피곤하세요? 오늘 많이 다녀서 그런 거 아니에요? 잠시 쉬었다가 가요. 우리 다시 송학 커피점 갈까요?” 며느리의 말에 노신사가 대답했다.

“너도 저기 커피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이번엔 가서 시원한 커피 한 잔 마시면 좋겠구나.”

“또 저 집 가요? 피, 다른 데 가보면 더 좋을 건데.” 투덜거리던 소녀가 먼저 송학 커피점의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갔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들이켠 노신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제강점기는 정말 힘들었을 거야. 나도 겪어 보진 않았지만. 너희들 터널 들어가 봤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터널에 들어가잖아. 지금은 터널에도 불빛이 있어서 밝지만, 그때 당시에 우리 국민들은 그 터널 속에서 보이지 않는 출구를 향해 가는 것과 같았을 거야. 출구를 찾아 겨우 나왔지만, 깜깜했지. 광복을 맞았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지금은 저 가로등이라도 있으니 망정이지. 깜깜한 밤길을 걷는 그런 심정이었을 거야. 그나마 진해는 전쟁의 그늘에서 약간 비켜서 있었기에 그때의 모습이라도 유지하고 있겠지. 굴곡진 역사를 살아온 우리 부모들은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더 애를 쓰고 말이야. 살아야 했으니까. 그리고 배우지 못하면 가난을 벗기 힘들고, 배우지 못하면 자유조차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 조상들은 어두운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한 번씩 달빛이 비치면 그 흐릿한 달빛 속에서 희망을 찾았을 지도 몰라. 가끔은 보름달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긴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아올 것이라고 믿었을 거야.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아버지. 너무 복잡한 생각은 좀 접어 두시고, 시원한 커피 드세요. 과거에 너무 집착하실 필요도 없죠. 과거의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옛일을 바탕으로 지금의 우리 삶을 잘 영위하면 되죠.” 아들은 여전히 무심한 척 이야기했다.

“엄마. 이것 보세요. 여기도 등록문화재로 나오는데요.” 소녀는 스마트 폰을 다시 엄마에게 건넸다.

『송학동 근대상가주택 : 국가 등록문화재/ 상업시설/ 지상2층 1동, 지상1층 1동, 연면적 321.29㎡/ 근대도시계획에 의해 형성된 도로면을 따라 장옥형태로 지어진 건축물로 건축형태와 구법, 내부공간구성 등이 해방 전 가로형 상가주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건축구성요소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지역의 생활문화와 도시·건축사적 가치가 충분하여 등록문화재로서 보존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이상하게 다시 오고 싶더라니. 역시 내 느낌이 딱 들어맞았어.” 며느리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꽃 피는 봄이 오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 다시 진해에 오고 싶다.” 소녀는 기지개를 켜며 웅얼거렸다.

“아, 나도 꼭 그러고 싶다. 여보, 아버님, 이번 봄에 꼭 한번 와요. 네?”

“그래, 그래. 꼭 옵시다. 내가 휴가를 내서라도 진해에 벚꽃이 만발할 때 꼭 옵시다. 그때는 진해에서 대해서 자료를 좀 더 찾아보고, 갈 곳도 더 찾아보고, 그리고 국가등록문화재도 더 찾아보고, 무엇보다 맛있는 식당도 찾아보고 옵시다. 배고프다.” 아들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과거 진해 거리를 수놓은 것이 벚꽃만은 아니었어. 수많은 해군과 군무원, 그리고 그들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도로를 수놓기도 했구나. 배달도 다 자전거로 다녔으니. 그래서 이곳에는 자전거방이 참 많았지. 창원이 ‘누비자’라는 자전거로 유명하다더니. 거 봐라. 과거와 현재는 묘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니까. 허허허.”

소녀는 혼자 깊은 생각에 빠졌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은 너무 친하거나 너무 낯설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 같다. 너무 친하면 몸이 기억을 할 것이고, 너무 낯설면 그 낯섦에 기억을 해두려고 애쓸지 모르겠다. 어느 쪽도 아니라면 쉽게 잊히고 말겠지. 지금 우리에게 다가온 진해의 모습처럼. 진해, 다시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 진해를 기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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