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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말고 머물자

by 말글손

멈춤과 머묾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끊임없이, 쉴 새 없이 변하는 세상, 자연, 사람, 그리고 소소한 일상조차 끊임없이 흐르고 변한다. 잠시라도 그 변화를 놓치면 따라잡기 힘들다. 현대의 삶은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간다. 도시의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고, 그만큼 더 빨리 지쳐간다. 시골의 모습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살던 시대는 이제 기술 발달로 자연의 시계를 조절하며, 때로는 거꾸로 돌리기도 한다. 딸기의 제철이 겨울로 변해버린 것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모내기할 때면 동네 사람이 모였다. 모를 쪄 물 잡힌 논 곳곳에 잘 던지고 나면 이내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줄 넘어간다!” 반듯하게 자리 잡은 못줄에 맞춰 모내기는 이어졌다. 허리 한번 펴지 않고 쉼 없이 모를 내다가도, 멈춰진 공간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불어오면, 어른들은 하나둘 허리를 폈다. 흐르는 땀을 훔치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양어깨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켜곤 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면, 다시 “줄 넘어간다”가 울렸다. 한 마지기에 모를 내는 동안, 서너 번의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어른들은 허리를 펴고 바람을 맞았다. 멈추지는 않았지만, 잠시 바람과 함께 잠시 머무는 여유. 그것이야말로 농부의 지혜였다.

중학교 1학년, 주말이나 여름 방학이면 소를 먹이러 들이나 못둑으로 나갔다. 친구들에게 뽐을 낼 요량으로 형님들이 읽던 책,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카를 힐티)를 옆구리 끼고 나섰다.(참고로 제목만 어렴풋이 기억나서 작가의 이름은 검색했다) 못둑 앞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는 참으로 근사했다. 고삐를 뿔에 잘 감아두면, 소는 알아서 풀을 뜯었다. 소가 풀을 뜯는 사이 낮잠을 청했다.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내리는 햇살을 가리느라 책으로 얼굴을 덮고 플라타너스 그늘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그늘은 자리를 옮기고 뜨거운 햇살에 잠을 깨었다. 흘러내린 침을 닦고 나면 잔디밭에 뒹구는 책을 줍는다. 해가 흐르고, 그늘도 따라 흘렀다.


언제부터일까? 도시에서 살면서 자연 속의 여유를 잊고 지낸 지 오래다. 물론 주말이나 휴가를 즐기면서 나름의 시간은 즐기며 살아간다.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여유라 마음이 편하기도 하지만, 그 예정된 여유조차 일정에 맞추고 산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면 팔을 벌려 바람을 느끼고, 구름이 햇살을 가리면 하늘을 보며 구름을 바라보고, 구름 너머 해가 다시 햇살을 내리면 그림자를 들여다보던 그런 자연스러운 여유를 잊고 살았나 보다. 일상 시간의 머묾. 삶의 멈춤은 없지만, 자연이 전해주는 여유조차 없으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멈추지는 않되, 머무는 여유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돌아보고, 세상을 살펴야겠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멈추지 않고 변하는 세상. 다시 딸기의 제철이 여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만든 흐름에 적응하면서도, 자연이 말해주는 그 시간 속에서 잠시의 머묾과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스치는 바람도, 구름 사이 햇살도, 햇살 머금은 그림자도 하나씩 느끼다 보면, 끊임없는 삶의 변화도 잘 느낄지 모르겠다. 어쩌면 세상을 보는 비뚤어진 눈이 바로 설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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