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그미 Nov 05. 2020

거꾸로 집안

스뎅 냄비 버려? 말어?

"이제 버려 버리자~"

"웬 걸요? 한참 더 쓰겠는데요"

"아따~ 삼십 년 넘게 썼응께 본전은 뽑았다.
그냥 버려부러라!"

"김치 지질 때 이 냄비가 딱인디요?"

"내가 새걸로 하나 사다 주께. 이제 버릴 때도 되얏다. 냄비장사도 밥 먹고 살아야지~~"

"멀쩡한 걸 버리고 왜 새로 사요? 그게 다 지구환경에 안 좋은 거예요. 쓸 수 있는 데까지는 고쳐가며 잘 써야죠~"

"어이구~ 너 알아서 해라. 니 살림이지, 내 살림이냐!"

묵은지와 돼지고기를 같이 넣고 지진 스테인레스 냄비 손잡이가 흔들흔들하길래 차후 거취를 두고 어머님과 내가 벌인 설전이다.
흔들리는 손잡이는 십자드라이버로 나사를 좀 조이면 금세 해결될 것 같아서 난 더 쓰겠다고 완강히 주장했고, 어머님은 버리고 새로 사주시겠다고 하는 걸....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아싸~^^V

보통의 집 같으면 며느리는 버리겠다 하고, 시어머니는 못 버리게 할 텐데 우리집 풍경은 거꾸로다. 심지어 수시로 옷정리 하시는 어머님께서 더이상 안 입으시는 옷들 버리려고 내놓으신 게 눈에 띄면 냉큼 가져다 입곤 해서, 이젠 버리시기 전에 이 가운데 입을만 한 거 있음 추려내고 버리라고 나에게 인계해주신다.
늘 손빨래를 하시고 사후관리에 철저하시기 때문에 둘째 아가씨 말에 따르면 어머님 손에 들어온 옷은 매장에 걸려있을 때보다 더 새옷처럼 보인다고 한다. 동감이다.

그럼 오늘 집구석 안착에 성공한 이 스뎅냄비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역사가 있느냐?

어머님께서 30년 전 당신 생신에 그간 수고했다고, 사니라 애썼다고, 이 정도는 받을 자격 있다며 스스로에게 선물하신 냄비이다. 예전엔 냄비가 귀해서 보통 한두 개로 온갖 요리를 다할 때라, 쓸만한 냄비 장만하는 것도 큰맘 먹어야 가능한 것이었단다. 그런데 이 냄비에 꽂히셔서 당신 자신에게 생일선물을 하실 만큼 의미가 깊은 물건인 거다. 그러니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임을 내가 안다.

게다가 이 스뎅냄비는 두꺼운 바닥을 장착하고 있어서 졸이는 요리를 할 때 특히나 진가를 발휘한다. 음식을 오래오래 졸여도 잘 눌어붙지 않아 묵은지조림, 생선조림, 호박조림 등을 할 때면 꼭 꺼내어 쓰곤 한다. 그냥 고기만 넣어서 구울 때도 요긴하다.

절대 기름이 튀지 않고 연기도 나지 않는 특제 고기구이 전용팬을 몇년 전 어느 행사장에서 어머님께서 사오시기 전엔 주로 여기에 고기를 궈먹었다. 뚜껑이 있어서 기름이 튀지 않고 자주 뒤집어주지 않아도 잘 익으니까 일일이 굽는 것보다 세상 편했다. 지금도 전용팬을 꺼내기 귀찮으면 여기에다 고기를 굽는다.

더이상 쓸 일 없다 여겨지는 것들이면 지체없이 버리기를 생활화하신 어머님도 아파트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 나가셨다가 멀쩡한 냄비가 눈에 띄면 쓸만한지 살피시곤 주워오신다. 심지어 독일제 꽤 유명한 냄비도 들고 오신 적이 있다. 요리하다 태워먹어서 바닥이 좀 그을린 채 나온 걸 살림경력 60년이 넘으신 어머님께서 놀라운 닦기신공을 발휘하여 번쩍번쩍 빛이 나는 새 냄비로 둔갑시키셨다.

​"봐라~ 완전 새것같지야? 이렇게 좋은 냄비를 닦기 싫어서 홀랑 버리냐?"

(이 부분에서 잠깐! 한 지인의 전언에 따르면, 닦기 싫어서가 아니라 닦을 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탄 냄비를 버리며 스스로를 자책했던 신혼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꼭 닦기 구찮아서 버린 건 아닌 걸로~^^ )

때로 우리집에서 쓰는 냄비뚜껑에 문제가 있는 경우, 재활용에 나온 냄비 뚜껑의 부속품을 살뜰히 챙겨오시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집 냄비들은 연식이 최하 20년이다. 내가 결혼하며 사온 냄비가 제일 젊은 냄비인 셈. 아마 우리집 같은 곳만 있으면 냄비장사들 진즉에 망했을 거다.

새것 더 좋은 것이 자꾸 나오는 세상이지만
나는 오래 써서 손에 익은 것들이 좋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어머님과 한집에 사는 내 삶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