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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은돌 Aug 29. 2023

달랏의 호텔에서 암호문을 보았다

1922년에 프랑스가 만든 베트남의 호텔 투숙기

이번엔 정말이지 너무 피곤했다. 이 경치 좋은 달랏에 와서 제대로 구경한 건 하나도 없었고, 늦은 저녁,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버렸다. 달랏이라는 관광지를 이렇게 소비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번 방문은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곳 달랏에는 10번 넘게 방문했었다. 대부분 업무상 출장으로 왔던 것이었지만, 가족들과 휴가차 왔던 적도 몇 번 있었기에 달랏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딴라 폭포, 달랏 기차역, 바오다이 여름궁전, 쑤안흐엉 호수 등 달랏의 많은 관광지를 다녀보았다. 항상 더운 베트남 남부의 호치민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인에게 익숙한 산과 계곡, 그리고 도심지에 있는 커다란 호수를 가진 예쁜 도시, 달랏에 오면 산뜻한 기분이 든다. 날씨도 대개 선선한 봄, 가을 날씨와 같다. 연평균 기온이 20도이니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달랏에 '영원한 봄의 도시'라는 사랑스러운 별명을 붙여주기도 하였다.


이번에 달랏을 방문한 목적은 출장이다. 그것도 한국 본사에서 오신 높은 분과 함께 나온 출장이라서 주재원으로 베트남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아까 호치민에서부터 하루종일 온몸과 정신이 긴장되어 있는 상태다. 달랏 시내에서의 출장 일정을 끝낸 뒤에 미리 예약한 시내의 쑤안흐엉 호숫가에 있는 호텔에 들어왔다. 이 호텔은 달랏에서 가장 오래된 '달랏 팰리스 헤리티지 호텔'이다. 윗분과 함께 호치민에서부터의 출장 일정을 소화한 뒤에 녹초가 된 상태로 늦은 저녁, 숙소에 도착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제복을 입은 벨보이가 호텔 정문에서 짐을 받으며 우릴 안내한다. 이 호텔은 베트남을 프랑스가 통치하고 있던 시절인 1914년부터 건축하기 시작해서 1922년 문을 연 호텔이다.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시원한 고원지대에서 휴양을 즐기기 위해 만든 호텔인 셈이다. 


준공했을 당시의 호텔 사진


오후 늦게 달랏에 도착하여 일을 마치고 호텔에는 저녁 8시가 넘어 도착했다. 저녁 식사는 달랏 시내에서 이미 마친뒤였고, 윗분의 요청으로 체크인을 하기 전에 호텔 정원을 잠시 산책하기도 했다. 제법 쌀쌀해진 호숫가의 바람을 피하고자 재킷을 여미기도 하고 양손을 번갈아가며 바지 주머니에 넣어보기도 하며 조명을 켠 정원을 산책하고 로비에 다시 들어섰다. 100년이 넘은 호텔답게 호텔의 로비와 접수를 받는 프런트 데스크가 상당히 엔틱 하다. 호텔 로비를 둘러보던 윗분과 유럽의 옛날 영화에서나 볼법한 기다란 열쇠를 받아 나와 안내하는 직원과 함께 삐그덕거리는 나무 복도를 지나며 벽에 걸린 유럽 여인들의 초상화도 여러 개 볼 수 있었다. 구릿빛으로 반짝이는 기다란 열쇠를 객실의 열쇠구멍에 넣고 달그락거리며 여러 번 돌리자 문이 묵직하게 소리를 내면서 양쪽으로 열렸다. 난 윗분의 표정을 살폈다. '이 방을 마음에 들어 하시려나?' 하는 마음으로 윗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우와! 멋있긴 한데, 무서워서 잠이 오려나 모르겠다."


호텔의 라운지와 프런트 데스크


호텔 스위트룸의 거실과 침실


하긴 나도 그랬다. 윗분의 방문을 닫고 나와 내 방으로 걸어가면서 보이는 초상화들과 삐그덕 거리는 나무소리가 살짝 긴장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방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전화기도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었다. 전화가 정말 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소품으로 비치해 둔 것인지 궁금해서 수화기를 들어봤다. 뚜뚜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꺼운 금색의 테를 두른 거울과 침대를 감싸는 용도로 놔둔 것인가 싶은 커튼을 잠시 살펴보다가 샤워를 하고 나와 누웠는데, 바로 잠이 들어버렸다. 호텔에 있는 이불에는 뭔가 특별한 처리가 더 되어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호텔에서 이불을 덮으면 평소보다 빨리 잠이 드는 것 같다. 특히, 이날은 피곤해서 그런지 더 빨리 잠이 들어버렸다. 수면 내시경할 때 1부터 10까지 세는 소리를 다 듣기 전에 잠이 들어버리는 것처럼 금세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너무 어두웠고, 난 너무 피곤했다.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는데 몇 시인지 알아보려 손을 스마트폰에 뻗는 것도 귀찮아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번 눈을 깜빡이는데, 천장에 녹색 글씨가 있었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도서관에 있는 초록 스탠드 조명과 같은 정도의 밝기였던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바나나 잎으로 만들어 붙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알파벳인 것 같아 보였지만 너무 졸려서 잘 읽을 수가 없었다. '아까는 못 본 것 같은데, 내가 너무 피곤해서 호텔방을 잘 살펴보지 못했나 보다. 이게 뭐라고 쓰여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아침에 읽어보기로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부터 전화가 울린다. 새벽잠이 없으신 윗분은 일찍 조식을 먹으러 가자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품을 하며 전화를 끊고 나서 다시 방의 천장을 올려보았다. 아무런 글자가 없이 흰 천장만 있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새벽에 본 그 글자의 이미지가 너무 또렷했기 때문이다. 살짝 빛나는 초록색 글자가 천장에 동그랗게 사발통문 형태로 쓰여있었다. 읽겠다고 아주 조금만 노력만 했으면 바로 읽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는데, 너무 피곤해서 읽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일단은 조식을 먹으러 반짝이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호텔의 식당


이렇게 출장을 마치고 호치민으로 돌아왔다. 이제 몇 개월이 지났다. 난 아직도 그날 새벽에 천장에 쓰여있던 어떤 글자를 봤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가끔 그 글자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어떤 암호문 같은 건 아닐까? 이전에 써두었던 것인데, 다시 페인트를 덧칠해서 가려졌다가 특수한 환경에서 다시 보이는 것은 아닐까? 100년이 넘은 이 호텔에서는 귀신을 봤다는 목격담이 간간이 들리기도 한다. 오래된 호텔에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어쩌면 기대하지 않았던 다른 매력이 더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호텔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해본다. 다음에 다시 그 방을 배정받아 글자를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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