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베트남 시골의 거래처를 방문했다. 거래처가 우리 제품에 컴플레인이 있어서 해결하러 나온 것인데, 나와 우리 회사 직원들을 본인 집으로 불러서 식사 대접을 해주겠다고 한다. 한국에서라면 반대의 상황이 되어야 하겠지만, 베트남에서는 이런 상황을 여러 번 마주해 보았기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시골집에 있는 응접용의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았다.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인데, 마당에는 네다섯 마리의 닭들이 모이를 쪼으며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컴플레인과 관련한 업무 얘기는 금방 끝났다. 어느 정도 보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고, 차 한잔 하며 풀릴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주제였다. 키가 작은 남자 사장님과 나는 서로 악수를 하며 일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했다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잠시 후에 거래처 사장의 아내가 가지고 나온 음식은 베트남식 닭백숙이다.
베트남식 닭백숙은 이미 여러 번 경험을 해봤다. 한국의 백숙과 비슷하다. 다만 닭의 사이즈가 더 크고, 내장부터 머리, 그리고 닭발까지 말 그대로 닭의 모든 부위가 아무것도 버려지지 않은 채 나온다는 것만 다르다. 베트남은 한국보다는 질긴 식감을 좋아하기 때문에 닭을 더 오래 사육한다. 닭의 종류도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키우는 그 하얀색의 닭보다는 베트남의 토종닭이라고 부르는 닭을 좋아하는 편이다. 더 쉽게 예를 들면, 한국 마트에서는 보통 1Kg이나 그보다 작은 사이즈의 닭을 주로 팔지만, 베트남에서는 2Kg이 넘어야지 먹을만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처럼 한국과 베트남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디테일에서 다른 점들이 꽤 있다.
이번에 받은 닭백숙은 이전과는 다른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다리. 다리가 엄청 두껍다. 이 닭의 다리 두께를 볼펜에 비유한다면, 기존에 알던 일반적인 닭의 다리는 볼펜심에 불과한 사이즈였다. 닭백숙을 보자마자 두꺼운 사이즈에 깜짝 놀랐다. 난 우리 직원에게 이게 뭐냐고 물어봤다. 처음엔 '여주와 같은 채소를 삶은 것인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직원은 나에게 아주 비싼 닭의 다리라고 알려주었다.
동따오(Dong Tao) 품종의 닭
'동따오'. 이 이름을 잊지 못한다. 이 닭 품종의 이름이다. 역시 다시 보아도 공룡의 후손다운 늠름한 모습이다. 알고 보니 베트남에서는 엄청 귀하면서 비싼 닭이었고, 외국 회사의 사장이 왔다고 신경 써서 오랫동안 키운 닭을 잡은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먹기가 어려웠다. 여주처럼 오돌토돌한 표면과 두꺼운 사이즈를 보면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무토막같이 커다란 닭다리를 잡고 젓가락과 숟가락을 이용해서 살짝 뜯어보았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느낌이 징그러워서 그런지 나에게는 별다른 맛이 없었지만, 귀한 음식을 대접해 주어 감사하다고 말을 했다. 우리 직원들에게 좀 더 먹으라고 신호를 보냈고, 나 대신에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 맛있게 먹어주었다. 거래처 사장 본인이 알고 있는 귀하고 맛있는 것을 상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유래한 닭의 품종이라고 한다. 키우기가 어려워 많은 수의 닭이 있지는 않은 것 같고, 대신 고급 품종으로 알려져 있기에 비싼 것은 한 마리에 수백만 원까지도 하는 꽤 귀한 음식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래 봬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귀한 닭을 맛도 잘 모르는 나 같은 한국 사람한테 주다니... 다시 호찌민으로 돌아오는 길에 직원에게 물어보니 2년 넘게 키우던 것을 나 때문에 잡았다고 했다. 맛있게 먹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한 하루였다.
베트남은 질긴 닭을 좋아한다. 물론 젊은 사람들의 트렌드는 또 조금씩 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수년간 베트남에 지내며 보니까 일반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질긴 음식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망고도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먹는 노란색의 물렁한 망고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덜 익은 것이라 생각하는 딱딱한 초록색의 망고를 더 좋아하고, 속이 비치는 얇은 만두피를 자랑하는 만두도 베트남으로 오면 짜조라는 형태로 딱딱하게 변하게 된다. 베트남이라는 외국에 살며 비슷하지만 다른 그 디테일들을 계속하여 배우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하나씩 또 다른 차이들을 알아가며 나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