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윤가은 감독의 영화는 <콩나물>부터 <우리들>, <우리집>에 이르기까지 항상 어린아이의 얼굴로 시작된다. <콩나물>에선 명절 준비하는 이모들 틈에서 해맑게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얼굴로, <우리들>에서는 피구 게임을 위해 팀을 나누는 친구들 틈에서 선택되길 바라며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얼굴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집>도 하나라는 아이의 얼굴로 시작한다. 역시 두리번거리는 얼굴로 시작하지만 아이의 얼굴빛은 여태까지 윤가은 감독의 작품에서 보기 어려운 낯빛이 보인다. 불안함과 두려움이 섞여있는 낯빛. 아이의 얼굴은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고 가는 거친 언성 틈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콩나물>은 콩나물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서는 어린아이의 이야기다. 아이는 집 밖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강아지를 만나기도 하고, 모르는 아저씨를 만나기도 한다. 심지어는 막걸리까지 얻어먹어 노래하며 춤까지 춘다. 심부름을 하는 아이의 여정을 담은 <콩나물>은 아이의 첫 번째 세상 여행이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아이와 다른 아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우리들>의 주인공은 아이들 사이에서 친구를 만나고 친구와 친해지지만 친구와 다투기도 한다. 아이와 아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나와 같은 우리들 사이에 여행이며, 친구 관계의 여행이다. 세상을 여행하던 아이는 친구들을 만났고, 친구 관계 속에서 여행을 한다. 그리고 <우리집>에 이르러 아이는 친구에서 가족으로 향한다. 세상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가족으로 여행을 이어간다.
상자에서 우리집으로
유미와 유진이의 집에는 상자들이 가득하다. 색깔은 알록달록하고 크기도 들쭉날쭉한 온갖 상자들이 서랍장 한가득 채워져 있다.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유미와 유진이 그리고 하나에게는 상자 안에 담긴 내용물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들에게 상자는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지키고 싶은 우리집의 벽돌일 뿐이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상자를 가져와 자신들의 집을 짓는다. 그 집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색깔에,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쌓여나간다. 그 집은 아이들의 집임과 동시에 꿈의 집이며 그야말로 완벽하고 이상적인 우리의 집이다.
아이들이 만든 우리집은 아이들에게 완벽하고 이상적인 집의 형태를 가졌지만, 현실의 우리집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의 우리집은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아 있고, 각자의 뾰족함에 찔려가면서도 붙어있어야 하는 숨 막히는 공간이다. 가족이라는 묶음은 엄마와 아빠의 언성 소리에 의해, 부재하는 어른의 자리에 의해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어른의 세계에 의해, 무너져가는 가족 아래서 함께 흔들려간다. 하지만 <우리집>은 아이들을 체계 속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표현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가족 체계에 개입하고 노력하는 주체적인 존재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요리를 차리고, 자신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집을 보여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아이들은 작품 속에서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닌 작품을 이끌어 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표현된다.
생명력 가득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행복해지는 감정에 휩싸인다. 이사를 막기 위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집주인으로부터 도망치고, 요리를 계속한다. <우리집>의 아이들은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생명력 가득한 표정으로 행동으로 영화의 활력을 더한다. 아이들의 생명력을 해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영화에 스며들도록 한 작품이 얼마나 있었던가. 괜히 윤가은 감독 열풍이 부는 게 아니다. 영화는 내내 아이들의 활력으로부터 도움받아 작품의 동력으로 움직인다. 단순한 종이 상자들이 그토록 아름답고 귀여운 우리집이 된 것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집에서 다시 상자로
하나가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한 전날 저녁 들은 부모님의 대화에 하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매번 고성을 질러대며 싸우던 엄마와 아빠가 처음으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대화를 한다. 따로 지내자는 엄마와 아빠의 대화 앞에서 하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부 싸움 한가운데에서 불안하게 서있던 하나의 표정은 이 순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이 많아진 것 같다. 자신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차분한 어조의 엄마와 아빠의 대화는 하나에게 무슨 생각을 안겨주었을까.
<콩나물>에서 콩나물을 사러 나간 아이는 콩나물을 사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온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실패한 여정을 다루었던 <콩나물>처럼 <우리집>도 마찬가지로 실패한 여정을 담았다. 하나와 유미, 유진이는 부모님을 찾아 여행을 떠났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설상가상 하나는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유미는 핸드폰 배터리까지 닳아서 부모님과 연락할 마지막 수단이 끊어진다. 하나는 부모님의 헤어짐에 힘들어하고, 유미는 길을 잃음에 대해 두려워한다. 하나가 유미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유미는 하나를 탓한다. 하나는 가족을 지키고 싶었지만 지키지 못했고 유미의 말에 왜 나한테만 그러냐며 울먹거린다. 자신의 유미네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실패감에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의 여행은 실패로 돌아가고 아이들의 우리집은 무심하게 서있다. 이름 모를 해변 앞에서 짐 덩어리처럼 놓여있는 우리집은 아이들에게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이상적인 집은 길을 잃고 그 위로 아이들의 발길질이 지나간다. 엄마와 아빠를 화해시키고 싶었고, 평화롭게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싶었던 하나의 바람이 어젯밤 본 부모님의 대화에 의해, 실패한 여행에 의해, 길을 잃은 자신에 의해 무너진다.
해변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 꿈이 좌절된 아이들의 울음소리만큼 가슴 아픈 게 있을까. 윤가은 감독은 여태까지 힘든 길을 걸어온 아이들에게 텐트 하나를 선물한다. 오직 아이들만 있는 작은 집. 어른들의 세계와 맞닿아있지 않는 오직 아이들의 집. 하나와 유진이, 유미가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보는 장면은 따듯한 온색으로 스크린을 채운다. 그리고 다음날 하나는 다시 자신이 있을 집으로 돌아간다.
가족 여행의 마지막
어떤 여행이든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여행은 이곳을 떠나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 시작점에서 떠나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하지만 여행은 시작점으로 다시 되돌아오지만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여행을 가기 전과 후의 차이, 무지와 앎의 차이, 경험하지 못함과 경험함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 여행이다. 즉, 시작점으로 돌아왔지만 시작할 때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여행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집>의 마지막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 하나의 바뀐 표정을 느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부모님은 여전히 헤어질 위기에 놓여있고, 우리집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영화의 시작처럼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 결말에서 하나는 영화의 시작과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여기 앉아서 밥 먹자.” 하지만 하나는 시작과 같은 대사지만 다른 표정을 하고 말한다.
영화가 끝나면 적막한 식사 소리가 들려온다. 말끔히 해결되지도 말끔히 결정되지 않은 채로 수저를 들고 밥을 뜨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가 끝나고 하나의 부모님은 헤어질지도 모른다. 이혼을 하게 되어 따로 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가 끝나도 이어지는 이 식사 소리가 하나 가족의 소리임을 알고 있다. 만약 헤어져도, 비록 완벽하지 않아도 이들은 가족이고 이곳은 우리의 집이다. 영화는 완벽하지 않은 진짜 가족 여행을 기약하며 끝이 난다.
하나를 연기한 김나연 배우는 영화의 마지막에 하나가 어떤 생각을 했을 지에 대해 질문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는 처음에는 ‘가족이 무너지면 안 돼’, ‘엄마 아빠는 항상 같이 있어야 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여행을 다녀오며 생각하니 하나는 그렇게 떨어지시더라도 두 분에게는 그게 더 큰 행복이니까. 너무 완벽하지 않아도 행복이 있으니까. 그래서 '진짜 가족여행 가야지’라고 말한 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ps, <우리집> 중 <우리들>에서 나온 지아(설혜인 배우)와 선미(최수인 배우) 그리고 보라(이서연 배우)가 카메오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팔을 잘 보면 아이들이 같은 팔찌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윤가은 감독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들>의 설헤인 배우, 최수인 배우, 이서연 배우 모두 <우리들>이 끝난 이후에도 지아와 선미와 보라는 분명 다시 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윤가은 감독은 배우들이 말한 이 꿈을 <우리집>에서 실현시켜보고 싶어서 팔찌를 다시 만들어 다같이 끼도록 했다. 그리고 보라역을 연기한 이서연 배우에게 <우리집>에서는 ‘내가 손재주는 없지만 친구들한테 배워서 만들었어.’라는 대사까지 넣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