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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랑한 조각글 Jan 17. 2023

나는 흙 속의 진주였을까?

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부터 수학을 못 따라간다는 걸 알면서도 학원에 보내주지 못했다. 나는 친구가 다니는 학원에 무작정 나가면서 어떻게든 수학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고,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한 학원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보다 친절하고 다정했기에 배우는 재미도 있었다. 나는 열심히 엄마에게 수학 보충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누구보다 똑똑했던 내가 공부를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5학년밖에 안 된 내가 혼자서 학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공부하러 다니기 시작하자 엄마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한 달치 학원비를 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달에는 원비를 내지 못했다. 엄마는 나에게 수학학원을 다니지 말아 달라고 며칠 동안 설득했다. 나는 학원비를 떼먹은 아이가 되었다. 학교를 오갈 때 학원을 거치지 않게 뺑 돌아다녀야만 했다. 부모가 가난하면 학교에서 배운 도덕관념쯤은 가볍게 무시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부모의 치부를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거나, 원비를 떼먹고 도망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학원 다니기를 포기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학원 등록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 시절 흔한 단과학원 수업 한 번 듣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특별할까. 나는 이런 사연을 많이 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전쟁 직후 세대나 산업화 시대에 어린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뻔한 레퍼토리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은 90년대 초반이었기에 나에게 가난은 나만 특별히 겪는 재앙처럼 여겨졌다. 90년대 후반에는 IMF가 터지면서 다시 이런 이야기가 흔해빠졌지만 풍요로웠던 88 올림픽 직후의 버블경제에서 가난한 건 우리 집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국어와 영어, 사회와 과학을 잘했지만, 수학은 80점 만점에 16점이나 24점을 맞았다. 수학을 못했어도 논리력으로 푸는 과학문제는 거의 다 맞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성적으로 당시에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기 어려웠다. 수도권 4년제 대학을 나오고 나서 사회생활을 하는 내내 학벌 콤플렉스라는 건 남의 일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자존심이 세서 콤플렉스를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훨씬 드물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부모 없이 자란 고아가 서울대에 합격했다거나, 벽촌에서 EBS만 보고 수능 만점 받았다는 이야기가 흔했다. 언론은 그런 사연만 대서특필했으니 나 같은 사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은 고등학교 때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이었다. 세상은 우리 집이 가난했던 것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나에게 정말, 진짜로, 맹세코 최선을 다했는지만 물었으니까.


어린 시절 '두뇌가 명석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내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데다 잔머리만 굴리는 사람으로 큰 것이 정말 온전히 내 탓일까. 학교는 노오력과 경쟁을 중시하면서 학생들이 처한 계급적 현실을 은폐한다. 나는 공정 경쟁의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흙수저였던 것이다. 학교 선생님도 부모님도 이 세상도 모두가 네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네 탓이라고만 했으니 내 탓이 아닌 것도 내 탓을 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라고 여기며 자랐다. 나만 그랬을까? 가난해서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다들 그러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학원에 보내달라고 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 같다. 엄마는 필사적으로 나의 공부에 관심을 끄기 위해 노력했고 내 성적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된 이후 한 번도 성적표를 내놓으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내가 잘 봤다고 생각하면 보여주고, 망쳤다고 생각하면 안 보여주는 식으로 일 년에 한 번만 성적표를 들이밀어도 이번 학기 성적표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내가 시험을 잘 봐서 성적표를 내밀면 엄마는 기뻐하면서도 걱정했다. 성적이 크게 떨어져서 아빠에게 크게 혼난 적이 있기도 한데 그뿐이었다. 어떻게 공부하라든가, 모자란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문제집을 더 사서 풀어보자든가 이런 대책이 하나도 없었다.


공부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해야 했지만, 너무 잘하려고 욕심부려서도 안 되었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그래 우리 가끔 하늘을 보자. 비트. 같은 영화를 보면 서울 사는 아이들은 공부 경쟁에 메말라 갔고, 극단적인 폭력이나 자살로 내몰렸다. 나는 오히려 영화와 드라마 속의 극성스러운 부모가 부러웠다. 돈은 엄마 아빠가 어떻게든 벌어서 뒷바라지할 테니까 너는 공부만 해. 네가 우리 집의 기둥이고 희망이다. 같은 말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시험을 잘 봐도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았다. 아무런 응원도 지지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신도인 엄마는 내가 학교 공부를 하는 것보다 성경책 읽는 걸 더 대견스러워하기도 했다. 학교는 빠져도 교회는 빠지면 안 되는 게 엄마의 법칙이었으니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하나님이 모든 걸 알아서 해 주실 거라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엄마 아빠에게 내 성적은 아무런 걱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기도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다 보살펴주실 것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종교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흙수저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못 배운 한이 엄청나게 크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가 학원을 못 보내줄 수도 있다. 그땐 학원 안 다니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으니 나만 유별났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어릴 때 엄마 아빠가 공부 습관을 잡아주고, 내 성적에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줬다면 어땠을까? 집에서 공부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읽었던 책만 읽고 또 읽고 있는 내가 도대체 학교 숙제는 해 가는 것인지 엄마 아빠는 궁금하지도 않았을까? 내가 학원에 다녔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강남 8 학군 출신에 엄마 아빠가 배운 사람들이라서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면,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아니 엄마 아빠가 본인들은 못 배웠어도 자식만은 좋은 대학 보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다 큰 어른이 될 때까지도 이 질문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


이제 4학년으로 올라가는 나의 딸은 새로운 걸 배우기 좋아하고, 심심하게 앉아 있느니 추리게임이나 사자성어 외우기 게임, 속담 맞추기, 구구단 게임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다. 아이가 심심해할 때 스도쿠를 알려주면 몇 시간이고 그걸 붙잡고 시간을 보낸다. 학원과 학습지를 합쳐 7개나 한다. 영어, 피아노, 미술, 수영, 중국어, 한자, 요가. 집에서는 엄마인 나와 함께 수학공부를 한다. 일정이 빠듯해서 힘들거나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 마음이 크면 학원이나 학습지를 조금 정리하자고 해도 뭐 하나 포기를 못하는 아이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친구들의 말에 갸우뚱하고,(엄마, 그런데 왜 유튜버들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지?) 진심으로 공부를 즐거워하며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요즘 아이들 누구나 그렇듯 우리 딸도 어릴 때부터 유튜브를 보면서 컸지만, 쓸데없는 걸 넋 놓고 보는 것 같아도 뭔가를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잡다한 지식이 또래에 비해 많다. 나는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너의 성취와 성장에 엄마가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다. 오늘 학교에서 뭘 배웠니?라고 물으면 종종 아이는 30분이 넘게 떠든다. 영어학원에서 뭘 배웠니?라고 물으면 당장 영어책을 가져와 오늘 배운 부분을 읽어준다. 피아노 학원은 재밌었어?라고 물으면 한 시간 동안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자랑이면 어떻겠냐만 자랑은 아니다. 나는 딸을 보면서 내가 저런 아이였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딸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내가 불쌍해 울컥할 때가 종종 있다. 같이 놀던 언니들은 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배워오는데 나만 글을 못 읽는다는 생각이 들자 종이와 펜을 들고 엄마에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 조르던 아이. 간단한 원리를 알려주자 단 몇 시간 만에 동화책을 줄줄 읽어내던 아이. 지적인 활동이 왕성하고 무엇이든 궁금해하며 책을 펼치면 마지막 장까지 읽기 전에는 잠도 안 자는 아이, 명작동화, 전래동화, 위인전, 과학학습만화, 역사만화, 어린이대백과를 읽고 모자라 어른들이 읽다 던져버린 신문쪼가리의 한자를 조합해서 어떻게든 읽으려고 용을 쓰던 아이. 성경책에 모르는 낱말이 많으면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한자어를 익히며 읽고, 성경의 깨알 같은 주석까지 함께 읽고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던 아이. 조금만 더 여유롭게 사는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 엄마의 치맛바람이라는 걸 조금 맞았다면 나도 영재발굴단 정도는 거뜬히 출연하지 않았을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수만 가지 가능성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내가 자랄수록 가난에 찌들어 서서히 빛바래가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무리 먹고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도 자녀의 재주를 발견해 주고, 뼈가 녹는 한이 있어도 뒷바라지만큼은 해주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세상엔 또 많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자랐지만, 슬프게도 나의 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박탈감을 느끼며 자랐다. 어릴 적에 자녀가 가진 재주를 발견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자신감을 키워줬다는 엄마를 가진 이들이 그렇게 부럽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아빠의 응원과 지지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칭찬받을 때라고는 동생을 잘 돌볼 때뿐이었다. 나는 대부분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 가끔 '착한 아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동생을 잘 돌보고 큰 말썽 부리지 않는 착한 아이. 칭찬은 내 일생에 독이 되어 돌아왔다. 착한 아이라는 칭찬 때문에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가면을 쓰고 사는 일에 익숙해졌고, 자아는 분열되었으며, 분열된 자아는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불신했다.


나는 아빠가 나를 '착한 딸'이라고 부르기 전에 나의 성적표를 궁금해하길 바랐고, 엄마가 나를 교회에 보낼 시간에 학원에 보내주기를 바랐다. 엄마 아빠의 착한 딸이 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부터 신을 버렸고 교회를 등졌다. 입시학원 강사가 되어 일요일마다 교회 대신 학원에 나가 하루 종일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돈으로 아버지가 진 빚을 다 갚았다. 시행착오를 마음껏 겪으며 천천히 자라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독립을 이루는 것은 물론 실질적 가장노릇을 하게 되자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식사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이 보살펴 주셔서 큰 딸이 잘 먹고 잘 살게 되어 감사하다고 해서 내 속을 뒤틀었다. 내가 항의하자 아빠는 자신이 평생 가난으로 고생하는 동안 자식들만은 이 가난과 모멸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노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여유롭게 사는 이유가 자신의 기도 덕분이라고 우겼다. 이후로 나는 식사기도조차 거부했고, 지금까지도 식사기도에 참여하지 않는다.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을 때 내가 있다면 아무도 큰 소리로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각자 조용히 할 사람만 하면 된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내 삶이 오로지 내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며, 야훼신의 도움을 단 1%도 인정하지 않는 것, 혹시 엄마나 아빠가 그딴 소리를 하면 버럭 화를 내는 것이 나라는 진주를 흙 속에 파묻어버린 엄마 아빠에 대한 일말의 복수다.


아이템풀 같은 학습지를 풀기 싫어서 밀리고, 그걸로 엄마에게 혼난다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친구의 학습지를 대신 푸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내가 이거 재밌는데? 하고 풀면 친구는 그게 얼마나 귀찮은지 아냐며 푸념을 했다. 푸념조차 부러웠다. 나도 너무 많은 학습량과 숙제에 떠밀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친구에게 숙제를 미루고 엄마에게 걸려 혼나고 싶다. 엄마의 관심이 오로지 내 공부, 내 성적, 내가 미래에 무엇이 될까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했더니 누군가가 그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냐면서 나를 나무랐다. 그 사람은 엄마의 치맛바람으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살았다. 전 과목 족집게 과외를 받으며 일류대에 갔다가 우울증에 걸려 학업을 다 마치지도 못했다. 얼마 전까지 이런 소릴 들으면 착한 아이로 자란 나는 그렇지, 너도 얼마나 힘들었겠니 하며 진심으로 공감하며 위로해 주었다.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 건 그쪽이지 내가 아니었기에.


그런데 오늘은 어쩌라고? 웃긴다... 니가 나로 살아봤냐? 아니잖아.라고 말하고 싶다. 너는 가난해서 못 배운 내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데 왜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자라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자기 방 자기 침대에서 자면서 온 과목 과외 선생님을 두고 배울 만큼 배운 너의 고통에 공감해 주어야 하는 거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위로하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의 나를 가장 불쌍한 존재로 생각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살면서 무슨 고통을 얼마나 겪었든 그건 여기서 다루고 싶지 않다.(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다룬다.) 내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서 내 고통이 더 작은 것이라고 말하는 무례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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