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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더 덕 Jun 04. 2020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

이탈리아 소도시 인턴십 이야기

버스를 타고 구비구비 산을 넘어가고 있다. 하늘은 파란색, 산은 초록색. 구름 한 점 없는 날.  


오늘 업무는 내가 사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몬텔레오네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조하는 일이다. 일종의 찾아가는 공연 서비스랄까.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공연예술을 접하기 힘든 작은 마을에 예술가들이 찾아가 공연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다른 직원들은 공연팀과 먼저 출발했고 나는 스폴레토에 남아 회사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가고 있다. 원래는 스폴레토발 관객을 인솔하는 역할이었지만 알고 보니 이 곳에서 출발하는 관객은 아주머니 둘이 다였다. 아드리아나 친구겠지. 혹시 몰라 길 건너편에 서있는 무리에게 공연 이름을 외치자

'우린 중국인이 아니에요 ~!'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입 다물고 버스에 올라탔다. 빌어먹을. 차창에 턱을 괴고 바람을 맞으며 얼굴을 식혔다.  


어디까지 올라가는 걸까. 구불구불 끝없는 커브에 머리가 흔들흔들. 슥슥 지나가는 이름 모를 나무들을 보니 서울 나무랑 뭐가 다른지 궁금했다. 자잘한 버스 진동과 휙휙 지나가는 풍경에 슬슬 눈이 감길 때쯤 버스가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푸른 산꼭대기 자리한 갈색 마을.  초록의 높은 산꼭대기 여럿이 요새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돌길을 올랐다. 아드리아나의 말대로 마을을 들어서자마자 제일 높은 곳에 시계탑이 보였다.  


'아드리아나!'

익숙한 뒷모습에 소리를 질렀다.

'잘 왔네!'

'사실 잘 못 올 뻔했어. 스폴레토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승용차에 탄 남자가 나한테 몬텔레오네를 가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까 버스는 좀 더 기다려야 한다면서 자기가 데려다주겠대. 그리고는 뭐라뭐라 말했는데 못 알아들어서 이 사람이 버스기사인 건가? 버스 기산데 버스 가져오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같이 가자는 건가? 근데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냥 괜찮다고 여기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그냥 가더라고.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버스가 왔는데 기사가 아까 그 사람이 아닌 거야. 승용차 탔으면 어쩔 뻔했어.'

엄마를 찾은 아이 마냥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드리아나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로마였다면 사기꾼이었겠지만, 우리 동네니까 그냥 친절하고 오지랖 넓은 사람이었을 거야.'


오늘 공연은 마을 소극장과 광장에서 진행된다. 마술, 음악 연주, 춤 등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공연팀이 출연한다.

200석 규모의 극장에 마을 주민들과 공연 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맨 앞 줄에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쪼르르 앉아있었다.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입을 막고 쿡쿡대며 웃고 있었다.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있는 극장이었다. 이렇게 작고 고립되어 있는 마을조차 극장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부러웠다.

스무 명 남짓의 관객. 마술 공연이 시작되자 맨 앞 줄 아이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이들은 좀처럼 숨기는 법이 없다. 놀라움, 웃음. 극장 공연이 끝나고 광장에 연주와 노랫소리가 퍼지자 광장을 둘러싼 주택들의 창문이 하나 둘 열렸다. 창가에 기대어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집 밖에서 나와 사람들과 어울렸다. 소박하고 즐거운 공연이었다. 돌바닥에 앉아 멍하니 연주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편안하고 그늘은 시원했다.  


공연이 끝나고 마을 측에서 간단한 먹을거리와 술을 준비해주었다. 마을 사람들과 공연팀 모두 모여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밝은 인상의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물론 이탈리아어로. 나는 당황했지만 어학원에서 배운 표현을 최대한 끄집어내 대꾸했다. 나이, 고향, 직업, 언제 왔는지, 언제 가는지. 할머니는 내 허접한 이탈리아어를 기특해하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리가 있나. 하지만 할머니의 눈빛이


'먼 길 와서 힘들겠다. 잘 지내야 해.'


하고 말하는 것 같아 괜히 꼬옥 안기고 싶었다.


한동안 길에서 내 이름의 끝음절만 들려도 고개가 휙휙 돌아갔다. 남자친구가 부르는 것만 같아서. 이 곳에 내 이름이 울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혼자서 버틸 수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혼자 지내는 건 계속 힘들다. 그래서 나는 빈자리를 채울 것들을 찾았다. 할머니의 따듯한 말이라던지, 사람들의 편안한 표정, 시원한 그늘, 음악, 함께 먹는 음식, 집에 가는 길에 열린 블랙베리 같은 것들.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


버스를 기다리며
구글에서 찾은 몬텔레오네 사진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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