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나는 잘 나가는 국제회의 통역사도 아니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통역계의 셀랩도 아니다.
20대 중후반이 주를 이뤘던 통번역대학원 동기들 사이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았고 그나마 그것도 세 번째 도전에서 간신히 입학했던 30대 중반의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통역사가 될 수 있는 언어적 토대를 굳이 찾아보자면 어릴 때부터 극적 드라마가 있는 문학을 좋아했다. 어머니가 빠듯한 살림에 장만해 주신 세계 명작 동화와 한국 위인전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다. 밤에 눈을 감고 누우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날 읽었던 이야기의 장면 장면이 복귀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내 한국어의 기초가 아닐까 싶다.
영어는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알아듣지도 못하는 AFKN을 들여다봤다고 했다. 영화 ‘킹콩’과 ‘제너럴 호스피털’ 장면들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영어 유치원도 없던 시절, 설령 있다 해도 꿈도 꾸지 못 했을 형편에 나에게 유일한 영어 노출은 AFKN이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라이언 킹’ 비디오테이프를 반복해서 봤다. 텔레비전 모니터 아래 부분은 신문지로 붙여 자막을 가리고 반복해서 시청하며 듣기 공부를 했다. 누가 시켜 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있었다. 학부 선배가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녀 그 모습에 이끌려 읽게 된 존 그리샴의 법정 소설 시리즈와 코리아 타임스, 코리아 헤럴드 기사는 모국어가 아닌 영어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줬다. 생각해 보면 이런 과정들이 쌓이고 쌓여 그나마 대학원에 입학할 수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통번역대학원 2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이자 동시에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어쩜 저렇게 영어를 우아하게 잘할까 싶은 교수님들과 동기들 사이에서 늘 헉헉대며 외줄 타기 하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돌아보면 신기하게도 아무리 비루하고 남루하게 느껴져도 동시에 충만함을 느꼈고 행복했던 것 같다. 매일 그저 영어와 한국어 공부만 하면 됐으니까. 어떤 날은 100미터 달리기에서 일등으로 들어온 듯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가 어느 날은 마라톤을 죽으라고 뛰었는데 꼴찌로 들어온 것 같았다. 풀이 죽은 날은 영화나 쉬운 소설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고 통역이 잘 되는 것 같은 날이면 마치 잘 닦아 놓은 길을 질주하듯 더 몰아붙였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4년 간은 금융기관에서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그 뒤 지난 11년 간 주한 외국공관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재직 중이다. 대사관 통번역은 주로 대사님 휘하 외교관의 한국 교류에 대한 통번역 지원을 하고 한국과 호주 정부 대 정부 고위급 교류를 위한 통역 업무를 수행한다.
지난 2021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호주를 국빈 방문했을 때 호주 총리의 통역사로 양국 정상회담에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2012년부터 모교인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앞으로 통역과 워킹맘으로서의 이야기를 공유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