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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상 Jan 31. 2020

자기부정의 재난영화

영화 <백두산>

영화 <백두산>에서 유독 이상하다고 느껴졌던 장면. 백두산의 2차 폭발이 발생하자 리준평은 ICBM을 해체 중이던 조인창 대위의 팀을 버리고 도주한다. 그러나 리준평은 이내 중국 측으로부터 임무를 받게 되어 다시 조인창 대위 팀과 합류한다. 승강기에서 조우한 그들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데, 곧바로 이어지는 쇼트에서는 갑자기 지진으로 무너지는 건물로부터 부리나케 도망쳐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쇼트에선 앞서 댐이 무너져 쏟아진 물에 휩쓸린 지영이 한강 위에 떠있는 모습이 나온다.


연속된 이 3개의 쇼트는 어쩐지 그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다. 인물들이 승강기에서 조우하는 쇼트와 그 다음의 도주하는 쇼트는 쇼트 간 리듬이 맞지 않고, 지영이 한강에 떠있는 쇼트는 그녀가 살아있다는 정보 외에 어떠한 서사적 의미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리듬과 서사의 불일치는 마치 세 쇼트가 단절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어색함에 대해 곱씹어볼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다음 장면에서 백두산의 2차 폭발이 예상보다 당겨졌다며 관객들에게 상황의 시급함을 주지시킨다.


엉성하게 편집된 쇼트들과 이를 무마하듯 덮어버리는 상황 설명. 나는 이 장면이 영화 <백두산>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을 보여준다 생각한다. 기억하기론 영화 <백두산>에 대한 비판 중 서사에 대한 비판이 가장 많았다. 이를테면 한강에 빠진 지영은 어떻게 미국인들을 탈출시키는 버스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는 그런 질문들 말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장면을 통해 여기서는 다른 걸 지적하고 싶다. 영화 <백두산>이 서사를 쌓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앞서 지적한 장면을 다시 복기해보자. 갑자기 조인창 대위 팀이 작전을 수행하던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지영은 댐이 무너져 쏟아진 물에 휩쓸린다. 우리는 그 원인이 백두산의 2차 폭발이라는 것을 이후 상황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단순히 2차 폭발이 진행되었다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2차 폭발이 예상보다 빨라졌다는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서사에 긴장감을 추가하고자 한다. 정리하자면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첫 번째는 갑작스레 발생한 상황의 원인을 정리해주는 것, 두 번째는 예상치 못한 상황의 발생으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


이러한 서사구조는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교과서적이다. 재난영화 또는 상업영화의 서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가 반드시 수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는 쉽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예상치 못한, 그리고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내용을 추가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서사구조의 큰 틀이 아니라 세부적인 곳에 있다. 영화는 인물들이 갑작스레 위험에 처한 쇼트들을 보여주고, 사실 그 원인이 2차 폭발 때문인데 심지어 그게 예상보다 더 당겨졌다고 말한다. 상황의 설명과 긴장감 조성이라는 두 기능을 한 쇼트에서 동시에 수행하는 까닭에, 앞서 제시되는 장면들은 오히려 상황의 시급함을 관객에게 알리기 위한 재료로 전락하고 만다.


이 장면의 문제점은 서사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겨 큰 틀에서의 서사구조에만 천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로 인해 세부적인 내용들은 큰 그림을 위한 부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장면을 이후로 나는 영화 속 재난의 상황에 몰입할 수 없었다. 영화는 인물이 처한 위험한 재난이 아니라 정해진 서사구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에서 내가 체감할 수 있는 것도 재난의 위험이 아니라 기승전결로 구조화된 서사일 뿐이다. 그러면 생각은 결국 여기까지 미치기 마련이다. 이 서사의 종착역엔 결국 한 영웅적 인물이 재난을 해결하게 될 것이라는 당연한 결말을 말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이 생각을 하는 순간, 재난영화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재난이란 소재는 분명 스펙터클화 하기 좋다. 그래서 동시에 서사에서도 긴장감을 줄 수 있는 장치를 많이 놓는 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히려 <백두산>은 재난영화라는 그 장르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만다. 영화는 자꾸만 등장인물들을 위험 속으로 담금질하는데, 그건 그 영화가 재난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재난의 스펙터클한 이미지와 긴장감 있는 서사를 구성하기 위해서다. <백두산>에서 재난은 영화의 소재라기보다는 상업영화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소재(재료)에 가깝다.


재난이 뒷전으로 밀려난 까닭에, 영화 속 상황은 자못 심각했지만 내겐 요란스러운 쇼에 불과했다. 게다가 재난으로부터 분리된 객석의 내 자리는 너무나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까지 <백두산>을 보고 재밌었다 하는 사람은 본 적 있어도, 재난의 위험을 절실하게 느꼈다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사실 영화가 재밌었다는 것에는 화려한 볼거리 외에, 언젠가부터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되어버린 ‘농담 따먹기 장면’-이를테면 조인창과 리준평이 드라마 <다모>를 가지고 우스운 소리를 하는 장면들-의 지분이 클 것이다.) 안전한 자리에서 바라보는 재난은 뼈 속까지는커녕 피부에도 와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백두산>을 재난영화라 부르기 꺼려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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