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각
정확히 1년 전 오늘. 그날 오후에 나는 원래 영화를 한편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생긴 다른 일 때문에 그 계획을 취소해야만 했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아녜스 바르다의 타계 소식을 알게 됐다. 그녀의 죽음은 왠지 쉬이 믿기 힘들었다. 죽음이란 거대한 무언가를 무방비 상태로 갑작스레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아니면 그보다 1년 전에 보았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의 감독의 모습 때문일까. 사실 그날 내가 보려고 했던 영화는 다름 아닌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였다. 무방비로 맞닥뜨린 우연. 그래서 1년이나 시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우연이란 말이 적절하달까. 아녜스 바르다의 타계 소식을 접한 날, 같은 도시 어디선가는 그녀의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내가 보려 했던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 역시 이 특별전에서 상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특별전은 그녀의 타계 소식으로 적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 추모전으로 그 의미가 변화되었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그때까지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과 <5시부터 7시까지 클레오>,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까지 세 편만 본 상태였다. 물론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얼마나 잘 알고 많이 보았느냐는 추모하는 마음과 무관하다. 오히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작품을 더 많이 보지 못했다는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심리이다. 이미 도착해있는 영화. 그 영화들을 나는 마치 새 영화를 보러 가는 마음가짐으로 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우연.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시간 순대로 따라가던 과정에서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를 봤던 날. 그날은 국내에선 본 영화의 소재와도 연결되는 낙태죄가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위반 판결을 받은 날이 되었다. 영화라는 픽션의 세계가 내가 살아가는 현실과 이어지며 발생하는 새로운 경험, 또는 영화와 현실 사이의 형용하기 힘든 공명. 그날의 일은 분명 우연이었겠지만, 차라리 마법이라 일컫고 싶어 지는 이 상황은 그날 내가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낄 수 있던 또 하나의 감흥이었다.
그리고 2달 후, 거의 모두가 기생충에 집중하고 있었을 때 그녀의 유작인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가 극장에 도착했다. 이미 2008년에 자서전과도 같은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만들었음에도 그녀는 한 번 더 아녜스 바르다 자신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대신 이번 작품에서 감독은 자신의 인생보다는 자신의 작품에 초점을 더 맞춘다. 마스터클래스와 그녀의 작품들로 이뤄진 영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만들어진 영화. 마지막 엔딩에 다다라서야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세상에 아녜스 바르다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을. 모래바람 속에서 아녜스 바르다가 사라지는 그 장면은,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단순히 연출로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영화가 세상과 만나면서 발생하는 공명. 그건 아녜스 바르다의 작품이 단 한 번도 세상에 대해 닫혀있던 적이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에서 감독 자신이 말하기를,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관심 있던 사람들로 영화를 만들어왔으며 그건 그녀에게 있어서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지는 그녀의 작품 중 처음으로 봤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후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 동시에 사회적인 무언가를 내포한 사람들. 그 관심은 데뷔작인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에선 주요 서사라 할 수 있을 한 쌍의 커플의 이야기와 어떠한 접점이 없는 어촌마을의 이야기가 시퀀스를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데뷔작에서부터 극영화에 다큐멘터리나 현실의 요소들을 차용하는 방식을 시도했다면, 반대로 다큐멘터리에선 픽션의 요소가 차용되기도 한다.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혼용. 감독이 이 방식을 사용하는 건 자신의 사유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작품 속에서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카메라를 펜처럼 사용한다는 에세이영화. 아녜스 바르다는 여러 오마주를 통해 제인 버킨의 다양한 모습들을 발견하는가 하면(<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시장에서 버려진 과일을 줍는 사람의 모습은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로 그 이미지가 연결되고(<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자신의 옛 기억들은 픽션으로 연출하여 회상한다(<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 아녜스 바르다는 언어와 이미지가 결합한 게 영화라 생각했다 고백한다. 곧이어 덧붙이기를 자신의 생각이 아니란 걸 금방 알게 됐다고 하지만. 이 말에 근거하여 아녜스 바르다의 필모그래피를 본다면,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로 시작해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까지의 과정은 오해와 함께한 시작과 궤도수정 그리고 성취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부터 시작된 그 시도는 하나의 진보적 방식으로서 여러 감독들의 족적과 함께 오늘날 에세이영화라는 주요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장르적 흐름 속에서 아녜스 바르다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고, 그 영화 속에서 자신의 사유를 드러낸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서 아녜스 바르다는 자신한테 중요한 세 가지 중 마지막으로 ‘공유’를 말한다. 감독의 말대로 영화는 혼자 보려고 만드는 게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영화를 찍도록 만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또는 그 이야기를 보고 발생하는 감독의 사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와 <방랑자>를 보는 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아녜스 바르다의 생각을 보는 것이고,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아녜스 바르다의 생각을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이야기와 감독의 사유가 관객에게 공유되어 사유의 경험을 이끈다면, 그 과정에서 영화는 현실로까지 그 의미망을 확장시키게 된다.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스크린 안과 밖을 매개하려던 한 명의 예술가를, 우리는 이제 그녀가 남겨둔 영화로밖에 만날 수 없다. 아녜스 바르다는 80세 이후에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두 편 찍었다(<아녜스 바르다의 해변>과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아마도 나는 그녀의 전작들을 보다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 두 작품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공유하고자 했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그녀의 사유를 구하기 위해 다시 다른 작품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곤 또 두 작품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그렇게 작별은 이뤄졌지만 영화라는 보존된 시간 안에서 우리는 만나고 또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