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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Apr 21. 2019

슬픈 봄, 마리타에게

제 마음 하나 달래려고요


할로! 마리타, 유진이예요. 어제 피터가 무지개 우산을 찾아줬어요. 독일인들이 왜 우산 대신 주로 방수 잠바를 많이 입는지 가족수대로 망가진 삼단 우산을 보니 알겠어요. 바람이 많이 부니 우산이 소용없을 때도 많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질 땐 우리에게 꼭 필요한 크고 튼튼한 우산을 어느 날 현관에 살짝 놓고 가셨잖아요. 얼마나 요긴했는지 몰라요. 딱 한 번 뒤집힌 적이 있지만 재인이 등, 하교 시간에 비가 오거나 혹은 존(남편 이름이 어렵다고 언젠가부턴 존이 됐고요)이랑 산책할 때 둘이 쓰기에 넉넉한 우산은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줬어요. 그걸 글쎄 도서관에 갔다가 놓고 오는 바람에 잃어버린 거 있죠. 도대체 어디서 파는지 보이지 않길래, 피터한테 말했더니 어딘가에 또 있을 거라며 창고를 뒤져서 찾아줬어요. 



피터는 뭐든 고치고 만들고 못하는 게 없는 슈퍼맨이라고 우리가 늘 말했잖아요. 무슨 일이 있으면 피터한테 말하면 뭐든 해결해주는! 어제는 글쎄, 한국에서 1월 29일에 배로 보낸 택배가 브레멘에 도착했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들어있다면서 수수료를 내고 찾아가라고요. 14일 안에 찾지 않으면 다시 돌려보내겠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어요. 두 달이 넘도록 도착하지 않은 게 기 막힌데 또 세관에 잡히기까지.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도대체 뭐지, 생각해보니 아마도 미역인 듯해요. 20킬로그램 대부분이 책일 텐데, 언니가 마지막 택배 상자를 닫을 때 가벼운 김도 자리가 없어서 뺏다고 했거든요. 편지를 피터에게 보여줬더니만 차로 같이 가줄 수 있대요. 무거운 짐을 어떻게 가져오나 고민하다가 캐리어에 담아오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쉽게 해결됐어요.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요. 마리타가 무지개 파라솔 우산을 현관에 살며시 가져다 둔 것처럼 피터도 그래요.




요즘 매일 존이랑 피터가 같은 차를 함께 출근하고 퇴근해요. 두 남자가 은근 잘 어울려요. 피터의 안색을 묻는데 조금씩 나아지고 있대요. 존이 그러는데 피터는 강한 사람이라고 걱정 말라대요. 존은 피터가 커피를 엄청 많이 마신다면서 백 킬로 넘는 속도에서도 한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운전한다고 걱정해요. 블루투스 이어폰이라도 사드리려고 핸디를 살펴보니 투쥐라 그건 불가능하고 이어폰이라도 사드리라고 재촉했어요. 할머니가 처리하던 세금 관련 영수증은 존이 하고요. 출력하는 데 필요한 프린터기도 마련해줬어요. 피터가 화이트로 지우고 덧입혀 썼던 문서 작업은 존이 만들어서 출력하면 피터가 좋아한대요. 각자가 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요. 물론 우리가 더 많은 도움을 받겠지만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세입자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폈다가 챙겨주는 사람이요. 우리는 어느새 멀리 있는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으로 살았잖아요. 오누이가 꽃에 물 주겠다고 투닥거린 다음 날 재인이에게 딱 맞는 앙증맞은 초록색 물조리개를 사다가 쪼르륵 세워두셨잖아요. 꼬막손 재인이가 풀 뽑겠다고 도우니 딸 장갑뿐 아니라 가족 수대로 장갑도 구비해두시고요. 정원일은 또 얼마나 꼼꼼하게 하시던지, 할머니 체력을 따라가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도 깨끗하고 예쁜 정원은 거저 얻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죠. 힘들게 가꾼 정원을 보면 뿌듯하고 한동안은 걱정 없이 예쁜 정원을 누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어젠 혼자 돌 사이에 낀 이끼를 할머니가 하던 대로 쪼그려 앉아 칼로 빼냈어요. 딱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만큼 풀이 자랐더라고요. 재인이는 늘 그렇듯이 조잘거리면서 엄마 옆을 맴돌고요. 큰 도움은 안돼도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진 않았어요. 할머니도 그랬겠죠. 정원일뿐 아니라 차 청소할 때도 옆에서 쫄랑거리는 재인이를 예뻐하셨잖아요. 할머니의 하나뿐인 딸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도 하고요. 독일에선 "아이고 내 작은 쥐(klein Maus)"라고 부르는 게 한국에선 할머니들이 손녀에게 주로 쓰는 내 강아지랑 같은 뉘앙스란 걸 저절로 알겠더라고요. 



매달 일정한 월세를 내고 사는 세입자 입장이지만 이런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했어요. 차양이 내려가는 소리에 사람이 있구나 안심하고 할머니는 재인이가 걷는 걸음이나 인형 유모차 끄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의 거리 말이에요. 유모차 끄는 소리에 따라 아, 재인이가 거실에서 부엌으로 가고 있구나, 짐작한다고. 마흔이 훌쩍 넘은 딸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장난감 유모차와 인형을 제 딸에게 과감하게 주셨잖아요. 이런 걸 아직까지 간직하고 계셨다니, 엄청 놀랐었죠. 흙 고를 때 쓰는 손 때 묻은 갈퀴는 엄마가 물려주신 거라는 말들. 마리타 이니셜을 새긴 마른행주도 엄마가 선물해주신 거란 걸 듣고 매일 그릇의 물기를 닦으며 엄마를 떠올리겠구나 생각했어요. 마른행주라면 엄마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일상 물건이니까요. 창고에 대롱대롱 매달린 당신이 정원일 할 때 쓰던 모자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주인을 떠올리는 것처럼요. 




피터가 지난주엔 미용실에 다녀왔고 혼자 산책도 나갔어요. 존이 장 보고 오는 길에 만났대요. 당신이랑 늘 함께 하던 그 산책을요. 예쁘게 정돈된 머리를 보고 멋지다고 하면 늘 마리타가 잘라줬다고 자랑처럼 말했는데 너무 짤록하게 자른 머리 스타일은 한층 젊어 보이지만 어쩐지 낯설어요. 피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머리스타일은 역시나 당신이 최고예요. 피터는 할머니가 없는 데 지저분하면 안 될까 봐 부러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아침마다 할머니가 채워주신 커피를 손수 내려 보온병에 가득 담아가고요. 제가 싸던 도시락도 대번에 거절하시던걸요. 뭐든 혼자 할 수 있다고요. 냉장고에 먹을 거 많다고 했는데 음식물 쓰레기는 커피 필터만 가득했어요. 



당신을 떠올리면 어쩜 그렇게 좋은 기억만 날까요? 당신의 죽음 앞에서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와 남겨진 삶에 대해 생각해요. 그리고 어떻게 잘 살지도요. 작년에 아빠가 돌아가신 클라우디아와 당신의 죽음과 혼자 남겨진 피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린 모두 죽음으로 향해 가는 길목에 있으니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겠다 다짐하면서요. 미래가 걱정되고 특별히 즐거운 일이 없다고 생각될 땐 어떻게 즐거움을 찾을까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질문을 갖고 살면 언젠가 희미한 답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당신에게 닿지 못할 편지를 써요. 제 마음 하나 달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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