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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Sep 09. 2023

한국어/이탈리아어 : 번역의 오류가 뿌리내리면

<이탈리안 레시피> 2화 : “MI PIACE, 나는 좋아합니다"

10살 이안과 6살 이도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한국 어린이입니다. 가족과 한국말을 하고 친구들과는 이탈리아말을 합니다. 두 아이의 한국말 표현에는 예상치 못한 특별함이 담겨있습니다. 처음엔 아이가 특별하고, 저의 육아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로 하면 특별하던 그 말들이 이탈리아말로 바뀌면 지극히 평범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특별함은 이탈리아말이 미묘하게 한국말에 스며들어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어떤 말들이었을까요? 저는 앞으로 아이들의 한국말속에 스며든 이탈리아말을 찾아 떠나보려 합니다.


<이탈리안 레시피> 2화
“MI PIACE, 나는 좋아합니다"


2021년 3월 이안이에게 아주 크게 화를 냈다. 2년이 넘게 지난 지금 내가 왜 그렇게 화를 냈었는지 그 이유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좀처럼 화가 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던 나에게 이안이가 했던 말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기억의 단서에는 기록도 있지만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이안이의 말을 듣던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 그 문장을 각인시켰다. 이안이 말했다.


엄마, 혼낸 걸 바로 잊는 게
엄마에게 좋은 것 같아.


당시 반드시 훈육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로 소화하지 못한 감정을 애꿎은 아이에게 화로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훈육이라고 하기엔 내가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으니 아마도 화를 분출했던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 아이는 나의 화를 받았음에도 휘둘리지 않았던 것 같다. 되려 엄마가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날 이안의 말이 나에겐 ‘엄마, 그 안에서 빨리 빠져나와.’라고 들렸다.


그 말이 너무 고맙고 아주 부끄러웠다. 


‘잊는 것이 엄마에게 좋을 것 같아.’라는 말은 곧고 강하게 나에게 닿았다. 이 후로도 종종 아이는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파스타 먹을까? 밥 먹을까?

"음.. 나에겐 파스타가 좋아."

이도가 무슨 색을 좋아하지?

"이도에겐 파란색이 좋아."

아빠 무슨 선물을 하지?

"아빠에겐 이게 좋아?"



나에게 좋아. 아빠에게 좋아. 엄마에게 좋아. 이도에게 좋아. 우리에게 좋아. 좋아하는 주체가 제 3자가 되어 목적어가 주어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듯한 표현이 좋았다. 내가 하는 말이 곧 자신이 되는 것처럼 이안의 언어도 이안이 되었다. 이안이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잘 아는 소년으로 자라났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우리를 둘러싼 위의 고민들은 도저히 답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막막함으로 막아서지만 '나에게 무엇이 좋은가?'의 질문은 왠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거대한 힘에 의해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 사이에서  '나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 발 떨어져 온전한 하나의 존재로 나를 존중하며 깊게 고민하며 스스로를 마주하게 만든다.


이후 둘째, 이도가 말을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도 역시 ‘나에게 좋아.’ 라는 표현을 썼다. 막연하게 이안의 영향인가?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한 이유를 최근에야 깨달았다.


이탈리아어 때문이었다.



영어로 "나는 수영을 좋아합니다."라는 문장을 만들어보자.


I like swimming.


이탈리아어로 동일한 문장을 만들면 이렇게 된다.


Mi piace nuotare.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서 Mi는 '나는'이 아니라 'a me' 즉, '나에게'이다. 이탈리아어로 '나는'에 해당하는 단어는 'io'이다. 이탈리아말을 처음 배우면서 가장 헷갈렸던 부분이다. 의 문장을 의역하면 '나는 수영을 좋아합니다' 지만, 직역하면 '수영은 나에게 좋습니다.’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은 영어나 한국말과 동일하게 "나는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굳이 왜 좋아한다만, "나에게 좋습니다.”라고 쓰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말 때문일까?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잘 안다. 누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가 아니라 ‘나에게 좋기 때문에’ ‘나에게 기쁨이기 때문에’라는 이유가 삶의 중심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행복까지 도달하는 높이가 낮고 하루 속 기쁨의 빈도가 잦다.



여하튼, 이안 특유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한국말 표현은 사실은 한국어로 직역된 이탈리아어였다. 2021년 3월 그날 이안이 하려고 했던 말은 "혼낸 걸 바로 잊는 것이 엄마에게 좋은 것 같아."가 아니라.

"혼낸 걸 엄마가 바로 잊어줬으면 나는 좋겠어." 였을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아이의 깊은 뜻은 철저한 나의 오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이안의 번역의 오류는 그 후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려 바닥을 칠 때마다 몇 번이나 나를 일으켰다. 스스로 ‘이 마음이 나에게 좋은 것일까?’ 되물으며 감정 밖으로 벗어났다.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면 스스로 ‘이 마음이 나에게 좋은 것이야!’ 되뇌며 소중히 끌어안았다. 나로부터 질문은 ‘당신에게 좋은 것인가?’으로 확장되어 느리지만 천천히 나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다.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 세상엔 나보다 어떤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그러면 넌 기분이 어때?"

"우리 반에도 진짜 많아. 기분? 난 상관없어. 난 내가 하는 걸 하는 거지."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잘하려고 해야 하는 걸까?"

"흠... 그런데 그러려면 엄청 힘들어야 하지 않아? 엄마, 사람은 오래 살잖아. 그런데 목숨은 하나지? 그런 게 그렇게 힘이 들면 오래 못살아. 무리하면 안 돼. 하지만, 노력은 할 수 있어, 그래. 노력은 해도 돼. 하지만 무리하는 건 안 돼. "

"그런데 좋아 보이면 따라 하고 싶잖아."

"그 사람은 그 사람 머릿속에 있는 걸 하는 거고.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걸 해야지."

"그게 뭔데?"

"재미있는 거."

"그렇게 계속하면 돼?"


응, 그렇게 계속하면 돼.


나에게 좋은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기쁜 것은 무엇인가?


번역의 오류로 아이에게 뿌리내린 말은 자라나 오래 재미있는 것을 계속하는 열매로 맺혔다. 그 열매를 보고 들으며 자란 엄마에게도 씨앗이 심겼기를 바라고 또 바라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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