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마 김작가 May 03. 2024

로마의 7살 한국소녀 : 이탈리아 영화 주인공이요?

내가 가진 것을 세상과 시장과 연결시키는 습관


세계 어린이의 날이 생기는 날이 올까요?


2023년 11월, 9살 알레산드로가 교황에게 물었습니다. 한 달 뒤 12월 교황 프란체스코는 세계 어린이의 날을 공표합니다. 그리고 그 첫 축제가 5월 25.26일 로마에서 열립니다. 바티칸 교황청은 제1회 세계 어린이날(WMB)을 기념하며 이탈리아의 유명 영화 제작자인 마네티 형제에게 단편 영화를 의뢰하였습니다. 마네티 형제가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았습니다.


세계 어린이를 대표하여 어느 나라 어린이가 주인공이면 좋을까?


여러 나라를 고민하던 중 둘은 한국 어린이를 떠올렸습니다.  8-10살, 한국어로 연기가 가능하고 이탈리아어 디렉팅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여자아이를요. 그렇게 오디션이 진행되고 가장 어린 이도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습니다. 최종 결정까지 제작자 측에선 꽤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늦은 밤 빗속 촬영씬이 예정되어 있고, 극의 전체를 주인공 소녀가 이끌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도가 주인공 역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Aperto"라고 설명했습니다.


*Aperto : 

이탈리아 말로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첫 미팅부터 이도는 영화 스태프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순식간에 모두와 친해졌습니다. 캐스팅 제안을 받고 이도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진지하게 도전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냈던 이도는 오디션에서도 역시나 아주 진지했습니다. 7살이지만 체조 대회에서 이도의 프로의식에 대해 충분히 느꼈기 때문에 이도의 욕망을 존중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화감독과 스태프 역시 이도를 동료로 대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감독님과 이도, 두 번째 만남


이도,
넌 오디션을 본 아이들 중 가장 어렸지만
완전히 열려있는 아이였어.
그렇기 때문에 우린 너와 함께 일하고 싶어.
그래서 널 주인공으로 결정한 거야.
늦은 밤 촬영이 있을 거고,
분명 힘들 거야.
하지만 우리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넌 우리가 만난 어린이 중 가장 특별해.
앞머리가 있는 7살 한국 소녀가 비 내리는 로마의 거리를 뛰고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줘.

 그가 휴대폰을 들고 쳇 GPT를 켰습니다. 몇 초 뒤 4장의 이미지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미지를 이도에게 보여주며 영화가 구현하고자 하는 모습을 설명했습니다. 감탄하는 나와 달리 신기함 거부감 등 여타의 감정도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도가 되려 신기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이탈리아 사람이 그것도 68년생 감독이 쳇 GPT를 사용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주요 장면들에 대한 동선을 맞춰보고 스태프 모두 젤라토 가게로 향했습니다. 7살 이도와 스태프 모두 혀를 날름날름 젤라토를 먹는 모습이라니! 이도는 스태프들에게 자신이 아는 게임을 제안했습니다.


“나랑 게임할래요?”

"규칙은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할 수 없고, Yes, NO, 검은색 하얀색은 말할 수 없어요. 이 규칙을 어기면 지는 거예요."


그렇게 한 명씩 이도에게 도전하며 한참 동안 젤라토 가게 앞에서 놀았습니다. 그야말로 세대를 초원한 엄청난 스몰토크의 향연이었습니다.


영화 감독 스태프들과 함께


 2년의 팬데믹을 겪으며 많은 생각들이 무너졌는데 그중 하나가 교육관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안테나의 방향은 언제나 한국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한국의 속도에 발맞추어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이 없었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당장 우리 가족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니 자식 교육은 뒷 전이 되었습니다.


바이러스가 변이의 변이를 거듭하며 팬데믹의 상황이 끝날 듯 말 듯 지리멸렬하게 이어지고 그때마다 이탈리아에선 코로나에 관련된 새로운 규정이 쏟아졌습니다. 한 주 걸러 발표되는 새로운 규칙에 맞추어 삶은 적응을 해야만 했고 일상은 모양을 바뀌었고 2년간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우리의 삶은 이상한 형태로 일그러졌습니다. 어느 순간 원래의 형태를 기억해 낼 수 없게 되어 세상이 구겨놓은 모양을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이 구겨지지 않기 위해선 '기존에 알던 것들, 배운 것들은 소용없다.'가 아니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을 매 순간 변형시킬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것이 피부가 배일 듯 너무나 날카롭고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 같은 사람도, 회사도, 상사도, 동료도 없으며, 여기엔 부모도 포함이었습니다.


결국 매 순간을 돌파해 나가는 힘은
내가 가진 것을 정확하게 알고,
현명하게 사용하고,
망설임 없이 시도하고,
두려움 없이 실패하며,
성공적으로 경험을 쌓는 것입니다.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생의 유연함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세상과 시장과 연결시키는 습관이 필요했습니다.


결핍을 즐기고
건강하게 욕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루지 못한다 해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나는 불혹을 코앞에 두고 무수한 두려움과 유혹에 휘둘리며 팬데믹이 깊숙이 일상에 침투해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선행 학습되어 자신이 하고 있다는 인식도 없이 이 사고가 가능하길 바랐습니다. 유연한 마음과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최대한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고 익숙하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코로나 락다운이 끝나자마자 무모하게 떠났던 캠핑카 여행은 낯선 방식의 여행이었음과 동시에 매일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여행이 불가능할 땐 아이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장소들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부모가 아니라 그곳의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에 대해 직접 물었습니다. 미술관, 박물관을 놀이터로 여기고 아이들은 현장에서 질문을 쏟고 답을 얻습니다. 낯섦이 익숙하고 모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이 당연하며 깨달음을 즐기는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나 스스로가 항상 배우고 열려있어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듯, 아는 만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지난 4년간 배움과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 로마는 물론, 미국, 독일, 영국, 핀란드, 일본, 스위스, 프랑스, 한국… 세계 어디든 떠남을 망설이지 않았고 그 과정을 글과 영상으로 성실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어와 이탈리아어의 자유자재로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제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대화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도가 열려있어서 함께 일하고 싶었다는 말에 지난 4년의 시간이 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상상하는 만큼 이루어진다고 했나요?


팬데믹 이후부터는 상상이 무용하게 느껴집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이 훨씬 더 신나니까요.


얼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