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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 김작가 May 09. 2024

나는 멋진 어른이 되기로 다짐했다.

'멋지게 살고 계시네요.' 라는 말을 듣는 어른으로

학창 시절 참으로 좋아했던 페이퍼라는 잡지가 있었다. 수 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대구의 내 방 책장에는 페이퍼가 자리하고 있다.

나의 보물들

하루는 페이퍼에서 정신과 영수증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는데, 영수증을 붙이고 그에 관한 짧은 단상이 남겨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인스타 감성이 90년대에 나왔던 것인데, 당시 나에게도 너무나 신박하게 다가왔다. 정신과 영수증에서 정신의 친구 사진작가 사이이다 로, 윈도 페인팅을 하는 그들의 친구, 나난 작가님까지 싸이월드의 파도를 타고 팔로우를 했다.


이후 윈도 페인팅을 하던 나난 작가님은  롱롱타임 플라워라는 프로젝트로 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2018년 이도가 두 살이 되던 해에 생일선물로 그림을 의뢰했다.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이도를 위해 크리스마스의 별이라 불리는 포인세티아에 사랑하는 이탈리아 여름방학 숙제의 문구 [Siete allegri come il sole, indomabili come il mare : 태양처럼 행복하게 바다처럼 길들여지지 않는]를 넣었다.

이도를 위해 의뢰한 그림 @nanankang

한국에서 그림을 받아 로마의 집으로 옮기는 일은 상당히 고행이었고  두 아이에 짐에 남편의 엄청난 핀잔을 들었지만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더불어 인생에 후회란 없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후회하는 일로 남기도 했다. 이도의 그림을 주문할 때 여름에 태어난 이안을 위해서도 한 점 더 의뢰를 하고 싶었는데 이안의 그림은 다음 해로 미뤘다. 다음 해에 코로나가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나난 작가님이 이토록 유명해질 줄 몰랐으니까.


무튼, 나난 작가님 싸이월드를 팔로우하면 또 한 명을 알게 되었는데 모과라는 청년(?)이었다. 페이퍼 잡지를 보던 시절의 대학생 나는 현실에 적응을 못하고 항상 다른 세상 어딘가를 꿈꿨다. 독하다는 소릴 들으면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미련 없이 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나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 모과라는 청년은 해외에서 친구들을 만들고 어느 날은 루이뷔통 행사에서 vj를 하고, 세상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던 나와는 달리 세상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렸다. 한 번은 그가 올린 피드에서 이런 문구를 보았다.


My hometown is everywhere
I'm a foreigner everywhere

내 고향은 모든 곳,
나는 어디에서든 이방인


이 문구가 뇌리에 박혀 이후 펜데믹을 겪으며, 로마에서 버티던 시기에 기록했던 글에 이 문장을 담아 두었다.


2020년 이탈리아 락다운 때 쓴 글

시간이 흘러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나는 한국을 떠났고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릴 것 같던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안이 태어날 즈음, 그는 한국에서 한식당을 차렸다. 2013년 11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유모차에 잠든 태어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이안과 그의 한식당, parc를 찾았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다 싸이월드와 인스타그램으로만 보던 모과 사장님과 마주쳤다. 용기를 내어 인사를 하며 이탈리아에서 가이드를 하며 살고 있다 우릴 소개했다.

2013년 parc 방문으로 잇몸 만개 / 어쩜 아기아기한 이안과 가신
유모차 타던 이안이 10살이 되고 parc 식당도 10주년

이후 유모차의 아이가 10살이 되어 중학교 입학을 코앞에 두고 있는 2024년까지 인친으로 인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난주, 친한 동생의 로마 방문으로 투어를 문의하는 DM을 받았다. 메시지를 주고받던 중 혹시 공연 관람은 어떠냐는 제안을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동생이 로마의 모든 지하철마다 깔린 공연 광고의 단원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연은 이미 매진이었다. 그러나 공연 전날 저녁, 마법처럼 우릴 위한 티켓이 마련되었고 로마의 토요일 밤, 유서 깊은 공연장 중앙에 앉아 황홀하고 우아하고 흥겨운 무대를 함께할 수 있었다. 단 한 자리로 남지 않은 공연에 어떻게 이런 좋은 자리에 우리 셋을 위한 자리가 남아있었는지....

로마의 유서깊은 극장에서 황홀했던 국악 공연

엄마 친구가 티켓을 선물했다는 말에 공연 내내 누가 대체 엄마 친구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고 엄마도 얼굴을 모르는 엄마 친구의 공연은 여운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세자의 꿈과 함께한 우리의 토요일도 마치 꿈을 꾼 듯했다. 신나게 머리를 돌리며 (상모 돌리기의 깊은 감동) 이안도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데 '와, 어른이 되어서 정말 신난다' 라는 생각을 했다. 어릴 때는 싸이월드 화면으로만 보는 것까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연락도 하고 어쩌면 진짜 만날 수도 있고, 때로는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한, 어른인 것이다.


주말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말도 안 되는 사진이 카톡으로 도착해 있었다.
옴마야!!

 사진 속에 2006년 수습 가이드 시절의 내가 담겨있었다. 회사에서 배낭여행 학생들 대상으로 무료 야경투어를 진행했었는데 당시 가이드 수습생인 내가 그 담당이었다. 투어 스킬은 물론 내용도 엄청 부족했는데 아마 학생들 눈에는 뭔가 많이 아는 가이드로 비춰졌을 것이다. 콜로세움이 야경투어의 마지막 코스였는데 이토록 허술한 투어에도 이상하게 감동은 짙었다. 다들 헤어지기 아쉬워 사진을 남겼는데 그 어느 날, 나와 함께했던 학생이 현재 나와 협업을 하는 고마워서 그래 대표님의 대학친구였다.


2006년을 기억하며 신혼여행에도 내가 몸담았고 남편은 현역인 자전거나라의 바티칸 투어를 신청했다는 말에, 나의 사수이자 현남편인, 가신이 '어떠한 순간에도 어느 누구나 최선을 다해 투어 해야 한다.' 고 누누이 당부했던 것이 떠올랐다. '너에겐 매일이지만 그 사람에겐 생애 단 한 번이라고 절대 투어를 허투루 해선 안된다.' 고 그는 힘주어 이야기했다. 그는 20년째 그 마음 그대로 변치않고 투어 중이다. 그의 말은 옳다. 2006년 부터 2024년까지 단 하룻밤의 투어를 손님은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너무 멋지게 살고 계셔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라는 메시지에 나는 멋진 어른이 되기로 다짐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우연을 인연으로  있는 힘이 생겼다는 것이다. 어떻게 어디서 언제 우리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니, 어떻게 어디서 언제 다시 만나더라도 '멋지게 살고 계시네요.' 라는 말을 듣는 어른으로 나를 키워 나가야지. 나답게.


그래서 이번 봄에는 이탈리아에서 영화 데뷔를 합니다. 응? 갑자기?


제가 오디션을 보고 이도 엄마 역을 따냈다고 말했었나요? (아니, 나는 현실에서도 가상에서도 역할이 이도 엄마여....)

나…어쩌면 소질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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