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10초 전에 멸망한 게 아니라고.
친구와의 대화가 이중언어의 방향으로 흘렀다. 친구는 한국인으로 남편은 이탈리아인이다.
"반에 외국인 엄마가 세 명이 있거든, 지난 주말에 반 생일파티에서 엄마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 한 엄마는 중국인인데 남편도 중국인이야. 한 엄마는 러시아, 남편은 이탈리아. 한 엄마는 영국인, 남편은 독일. 그 중국 가족 딸이 중국말을 너무 잘하는 거야. 그 엄마가 중국말을 완벽하게 한다고 하더라고. 로마에 중국학교가 있는데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업을 한대. 이탈리아 학교 숙제는 많은 것도 아니래. 중국학교 숙제가 너무 많아서 그거 하느라 이탈리아 학교 숙제 할 시간이 없다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토요일 중국학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빠진다고....거기에다가 중국 현지 온라인 수업도 듣는다고 하더라고. 중국 현지 수준이랑 맞추려고. 뭐, 그 집은 엄마, 아빠 다 중국인이니까 아이가 중국말을 잘하겠지 했어.
그리고 러시아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집은 아이가 러시아 말을 못 하겠지 하고 생각했어. 그 엄마는 이탈리아말도 잘하거든. 그런데 그 딸도 러시아 말을 완벽하게 한다는 거야. 러시아어 개인 과외를 받는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나에게 아이들 한국말 못 하냐고? 그러면 한국의 할아버지 할머니랑 어떻게 대화를 하냐고 되묻더라고.
그리고 영국, 독일 부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 그 집 딸도 독일말을 잘 한대. 그 아이도 독일어 과외를 받는다고 하더라고. 그 독일 아빠가 어릴 때, 영국에서 자랐는데 부모님이 자기에게 영어로 말했대. 그런데 부모님이 영어가 완벽하지 않으니 독일어랑 섞어서 말했다고.. 그러니까 브로큰 잉글리시. 어느 정도 자라서 독일에 돌아갔는데... 지금 자기는 영어, 독어 다 할 줄 알지만, 언제나 둘 다 불완전하다고 느낀대. 어느 언어도 완벽한 언어가 없다는 생각을 계속한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가 다짐했대. 아이가 생기면 절대 두 언어로 말하지 않겠다. 그래서 자긴 독일어만 쓰는데도 항상 내 독일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고.
여튼, 부모 언어를 하는 애들을 보니 기본 그 언어 개인 과외는 다 받고 있더라고. 내가 한국말을 하면 아이들이 알아들으니까 한국말을 안 해도 이해는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름에 한국에 갔는데 울 엄마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 거야.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말을 알아들은 거야.
그런데 이상하잖아. 내 주변에 한국 국제 커플들 보면 아이들이 대부분 한국말을 못 하거든? 그런데 일본, 이탈리아 커플들 보면 아이들이 다 일본말을 잘해. 중국 가족도 그렇고. 영국에 살 때 이탈리아 친구들 보면 다들 집에서 이탈리아어로 TV를 보더라고. 부모들도 아이들에게 이탈리아어로만 말을 하고. 생각해 보면 집에서 영어로 TV를 보고 부모가 아이들에게 영어로 말하는 가족은 한국 가족 밖에 보지 못한 것 같아. 내가 이제 와서 정말 후회가 돼.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쓰도록 했어야 했는데...."
"사람들이..아이들이 어리면 잘 모르지....부모가 한국말을 하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할 것 같으니....... 아이가 외국에서 자라면서 부모의 나라의 언어를 쓰게 한다는 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간단한 대화가 아니라, 어느 수준 이상의 대화가 가능하게까지 하려면 정말 노력해야 해. 그런데 아이가 어릴 땐, 그걸 이야기 해 줘도 잘 안 들리지... 적어도 6살까지는 주변에서 극성이다 할 정도로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 주변에서 종종 보잖아. 아이들이 어릴 때 한국어가 아니라 현지어로 말하는 한국 부모들... 부모가 그 현지어가 완벽하지 않은데.... 그리고 부모보다 더 신경 써야 하는 건 사실 형제간에 언어야. 애들끼리 한국말이 아니라 현지어로 대화를 해버리면 진짜 돌이키기가 너무 어려워."
"그런데 그 둘이 그렇게 현지어로 대화해 버리면 어쩔 수 없잖아."
"첫째에게 항상 이야기해야지. 동생은 너의 언어를 따라 하니까 꼭 한국말로 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해 줘야지.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들끼리 현지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잖아. 그래서 그 부분을 놓치게 되는데...어릴 때 한국말을 잘 말하게 하고서 형제들끼리 대화에서 언어를 놓치는 걸 보면 안타까운데... 아이들끼리 한국말을 사용하게 해야한다고 해도 그땐 잘 모르지.... 누가 그러더라. 교포 한국말을 아냐고. 해외에서 자랐는데 발음은 완벽해서 전혀 해외에서 자란 거 티 안나는 사람들이 있잖아.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살짝 이상한 거야. '어.. 얘 좀 모자란가?'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어휘가 이상하게 저렴하고..... 뭔가 상식이 부족해 보이고..... 문자 보내는데 'ㅐ' 랑 'ㅔ' 틀리게 쓰고....
이안이가 한국말을 잘 하잖아. 그런데 한 3년 전인가? 로마 한글학교에서 도전 골든벨 대회가 있었는데 기출문제 중에 통일 부분 문제가 있었거든. 문제가 '북한의 수도는 어디인가?' 였어. 그런데 이안이가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양'이라는 지명을 들어본 거야. 그때 '아차' 싶더라고. 아, 한글학교는 꼭 와야겠구나 싶었어. 아무리 아이가 한국말을 잘하고 집에서 한국말만 쓴다고 해도 압록강, 유관순, 속담, 사자성어, 순우리말 이런 건 알 수가 없는 거야. 한글학교가 아니면 아이들이 그런 걸 접할 기회가 전혀 없잖아.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다보면 다른 아이들보다는 한국말을 잘 하니까..잘 한다고 착각할 수 있는데... 그래서 어느 시기가 되면 한글학교에 안 오고...안타깝기도 해. 이안이 반은 중학생, 고등학생 합반이야. 아이들이 적어서... 그 나이 정도되고 아이들이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면, 대부분 한글학교를 안 나오는 것 같아. 아이들이 크면 주말마다 행사가 많아지니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거지. 한글학교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만이 아닌데..... "
후회막심이야...
아이들과 한국말로 대화하고 싶구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도 친구와의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교하는 이도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야기를 꺼냈다.
"이도, 오늘 엄마가 Y이모를 만났거든."
"응, 말했잖아. 이모 만난다고."
"오늘 이모랑 대화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안 가르쳐준 걸 진짜 후회한다고 하더라고..."
"지구가 10초 전에 멸망한 게 아니잖아."
"...... 뭐?"
지구가 10초 전에
멸망한 게 아니라고.
지금 해.
지구가 아직 있잖아.
지금 하라고 해.
이도의 그 말에 난 더 이상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친구의 한국어가 아니라, 나의 이탈리아어는 물론, 지구가 멸망한 것도 아닌데 지금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수많은 후회들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지구가 아직 있다는 것을, 지구가 여전히 내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잊고서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내 앞으로 나아가는 이도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이도!! 이도!! 방금 한 말 다시 해 줄 수 있어? 엄마가 비디오로 못 찍었다고!!"
"뭘?"
"아니이!! '지구가 10초 전에 멸망한 게 아니고' 한 거 그거 말이야~"
엄마, 알고 있네.
알고 있는데 뭘 또 말해.
엄마가 이미 알고 있는데.
맞네.
그걸 한 번도 모른 적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