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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티셔츠를 입고 원피스를 이탈리아 어로 읽는

혼돈의 이민가정

by 로마 김작가


한국이었다면 상식의 수준을 넘어 절대적으로 당연하게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 나의 아이들에겐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은 아이들과 한글학교 꽹과리 대회를 준비하면 서였다. 로마한글학교에선 일 년에 두 번 도전, 꽹과리 대회가 열린다. 도전, 골든벨과 유사한데 통일, 역사, 국어 분야의 문제가 출제되며 장원은 징을, 준장원은 꽹과리를 울린다. ( 왜 도전, 징 대회가 아니냐고 묻지 말자.)


작년, 이안과 기출문제를 공부하는데 북한의 수도가 평양이라는 답을 접한 아이의 생소한 표정이라니.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평양에 대해 아이와 대화할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올해는 설상가상으로 초등 고학년이 된 이안의 기출문제는 난이도가 엄청 높아졌다. 남북한에서 가장 긴 강’ 이 문제로 나왔는데 세상에, 압록강, 낙동강이 이렇게 발음이 어려운 줄 40 평생에 처음 알았다. 너무 당연하게 알다 보니 발음은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고쳐주어도 ‘낙록강’ ‘압동강’ 어처구니없는 답이 난무하고 옆에서 듣던 이도는 한술 더 써서 ‘낙똥강’ 이라며 웃고 난리가 났다.


[도전, 꽹과리 대회] 기출문제 중에서 (한국 초등 수준에 정말 놀랐다.)


국어에선 순수우리말 문제가 있었다. 이안, 친구의 순수우리말은 벗이야. 깜짝 놀란 아들이 묻는다. 엄마, 무슨 소리야? 친구가 우리말이잖아. 그럼 친구는 한국말이 아니야? 친구는 한자를 기본으로 하고 벗은 순수 한글로 이루어진 말이야. 한자가 뭐야? 그러니까 마법천자문 알지? 거기 한자가 나오잖아. 친구는 친할 친, 옛 구. 오래 사귄 사람, 이렇게 한자로 이뤄진 단어야.


엄마,
그러면 ‘친구’가 중국말이란 이야기야?


자, 역사문제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언제고 공포한 것은 언제인가요? 창제는 뭐고 공포는 뭐야? (슬슬 대회 준비가 공포스러워진다….)


1950년 6월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불법으로 남한을 침범하면서 일어난 전쟁이야. 이 전쟁을 뭐라고 할까요? 비겁한 전쟁


자. 이번에 국경일이야. 석가탄신일은 언제일까요? 석가탄실이 뭐야?


이번엔 속담이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무슨 뜻일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보고 왜 ‘나무’라고 부르는 거야?


A4용지 총 6장의 기출문제….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이안이는 동생 이도에 비하면 양반이다. 작년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대회에 출전하는 둘째 이도는 그야말로 가관이다.


이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입니다.’ O, X?

대한민국이 뭐야?

그러니까 한국에선 한국을 대한민국이라고도 불러.

그럼 수도는 뭐야?

그럼 서울은 뭐야?


이안이는 이도 나이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첫째는 엄마로 대변되는 한국과 100% 접점을 가지고 자랐다면 둘째는 50%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낮은 비율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첫째 때 불타오르던 교육열이 둘째 때는 그야말로 제대로 꺾였다. 그 때문에 말이 늦었는지 아님 말이 늦어서 상대적으로 대화가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여러 면에서 이안에 비해 이도는 다방면으로 노출이 적었다. 무엇보다 이안이는 어떻게든 알게 하고 되게 하려고 욕심을 부렸다면 이도는 쉽게 포기하고 단념했다.


작년 장원에 이어 올해 준장원을 한 이안
태극기 문제에 ‘택이’ 찾는 이도, 당당하게 오답을 들고 있는 그녀.

그래서일까? 이안이에겐 없었던 언어 습관이 이도에겐 보이는데 한글 문장에 이탈리아 단어를 넣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어 어휘 부족의 배경엔 일상 속에서 이탈리아 삶의 비중이 넓어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탈리아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짊어지게 되는 아이러니다.


첫째에서 둘째가 이 정도인데 세대를 거듭하면 그 접점은 얼마나 낮아지겠는가?


그러고 보니 내 자식들이나 내 손자들이 훗날 그들의 어린 날을 어떻게 기억할지 문득 궁금하고 한편 조심스러워진다. 나보다는 내 자식들이, 내 자식들보다는 내 손자들이 따뜻한 입김의 덕을 덜 보고 자라는 게 아닌가 싶다.

박완서 에세이 _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중에서


이런 생각이 깊어지던 시점에 동네 도서관에서 이중언어에 대한 글을 접히게 되었다. 그중 2번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이민 가정의 아이들은 부족한 어휘로 자랄 위험이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단순히 한국 문화의 상식이 아니라 이탈리아 상식에 있어서도 이안과 이도는 부족한 서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건 부모가 절대 채울 수 없는지 조부모 친척들 일상 티브이 등을 통해 입김처럼 채워지는 이야기의 조각들이다.


언어에 있어서 말이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스며드는 단어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가.


도서관 벽에 붙여진 이중언어 글, 2번은 ‘부족한 어휘로 자랄 위험이 있는 이민 가정의 아이들’ 이라고 적혀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의 이중언어 1편을 참고해주세요.)

https://brunch.co.kr/@mamaian/372


이안이는 요즘 원피스에 푹 빠졌다. 누군가 자신의 소원을 하나만 이뤄준다면 몸이 고무가 될 것이라니 진정 원파스 속 세계관과 한 몸이 되었다. 비단 이안이만 그런 것은 아닌지 여러 옷 브랜드에서 원피스의 그림이 프린팅 된 제품들이 등장했다. 이안이가 하트눈을 하고 티셔츠를 고르는데 그 옆에 ‘그림만 프린팅 된 것은 데는데 일본말이 적힌 것은 안돼’라고 초 치며 한글 프린팅이 된 티셔츠를 사는 나를 발견했다. 학창 시절 아들보다 일본 만화에 더 푹 빠져 살았으면서! 일본 문화를 참 좋아하면서! 심지어 절친의 남편이 일본사람이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아찔한 역사관에 어지러웠다.


어느 연령까지는 두 아이에게 한국의 정서를 심어줌에 있어 나의 영향력이 어마하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장 말랑한 생각의 시기에 선입견이 아닌 지식을 심어주는 경계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한글 티셔츠를 입고 이탈리아 어로 된 원피스를 읽고 있는 아이, 혼란하다 혼란해….

며칠 전 테이크루트(takeroot)에서 주관한 세미나를 들었다. 테이크 루트는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해외이주여성(엄마)을 돕는 비영리단체이다. 이민 1,5세대의 엄마와 korean_american 사춘기 아이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이윤승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takeroot의 자녀 교육 세미나

: 이윤승 작가님의 브런치

https://brunch.co.kr/@glolee



이탈리아에서 미국과 실시간으로 만날 수 있다니! 비록 시차로 아이들 수영 수업 시간과 맞물렸지만 샤워를 시키면서도 온 정신은 세미나 속의 목소리로 향했다. 만 15세에 미국에 이민을 가서 엄마와 자신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정체성의 이야기는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중한 나눔이었다. 부모를 통해 심어진 (아시안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강박을 인지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나아갔던 여정과 그리고 나아가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한 이야기에 잠시 멍해졌다.


“현재 미국에선 10가지가 넘는 성정체성이 있고 아이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난 아이에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모습의 정체성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중언어에 대해 글쓰기의 시작에는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한국이니 한국말을 해야 하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만 한다.’라는 마음이 앞서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부모로는 채울 수 없는 한계 너머까지 닿아야 한다는 강박은 없었는지 자문해 보았다. 너희가 한국인임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의 강요가 아닌 아이 스스로의 건강한 결정이 되기 위해선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다시 묻는다.


이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가 무슨 뜻일까?

사촌이 땅을 사는데 왜 배가 아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무슨 뜻일까?


무언가를 잃어도
힘을 내서 고쳐나가면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누가 채우는 것보다 나 스스로 담는 것이 더욱 반짝이는 법이다. 우리의 혼돈 속에서 만나는 오류를 지켜나가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다.





written by iandos.





p.s. 세미나 마지막에 작가님이 아이에게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라는 질문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이안도에게 같은 질문을 한 날은 제대로 아이들에게 성질을 낸 날이었다. 그래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 엄마는 어떤 사람이야?”


이안이 답했다.


나는 그냥 지금 엄마 그대로가 다 좋아.


과연, 엄마는 널 있는 그대로 다 좋아한다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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