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운차게 이 우주의 아침을
24시간을 꼬박 누워있었던 것 같다. 급체를 했는지 속이 뒤틀려 게워내는데 샛노랗고 시큼한 물이 나올 즈음에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두통이 시작됐다. 지구의 중력이 마치 머리에만 작용하는 듯 무거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이도 등교를 시키고 이안이 치과 진료를 다녀오고 결국은 침대에 또 쓰러졌다. 한없이 꺼져가고 있을 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한 페이지가 넘어갈 만큼 장문의 내용이었다. 고개만 까딱 돌려 문자를 읽다가 세상의 중력을 거슬러 몸을 일으켰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침대에서 나와 신발을 신고 밖으로 향했다. 약국에서 약을 사고 집에 돌아와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죽을 먹고 겨우 기운을 차릴 즘에 이안이 나를 대신해 이도 픽업을 다녀오겠노라 했다.
"엄마는 침대에서 좀 더 쉬어."
이안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를 듣고 까무룩 다시 잠에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맛있는 냄새에 눈을 떴다. 집안 구석구석 퍼져가는 짜파게티 냄새. 부엌에선 후룩후룩 정신없이 먹는 소리는 들렸다. 교복을 입은 채로 짜파게티를 먹고 있는 이도였다. 옆에 이도가 좋아하는 딸기 그릇이 있었다. 그 안에 가지런히 썰려있는 단무지가 담겨있었다.
"내가 이도 저녁 차려줬어. 엄마 더 자. 내가 끓였지만 너무 맛있어. 정승재 샘이 끓이라는 대로 끓였더니 기가 막혀. 다이어트하려고 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나도 끓여 먹으려고."
짜파게티를 하나 더 끓이려 물을 올리는 이안과 짜파게티를 입에 묻힌 채 "엄마 괜찮아?" 하고 묻는 이도에게 "고마워. 일기 쓰고 자." 짧은 말을 남겼다. 다시 방으로 걸어가는 데, 싱크대에 가득 쌓인 그릇들과 빨래통에 넘쳐나는 빨래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대로 지나쳐 침대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낮에 받았던 문자를 작게 소리 내어 다시 읽었다. 친구가 꿈속에서 미로를 헤매다 이안과 이도를 만났다고 했다. 어쩌다 그 꿈에 이안과 이도가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아기 이도와 지금보다 어린 이안이 있었다고 했다. 꿈속에서 이안은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단다.
"엄마,
우리는 여러 우주 속에 사는데....
어떤 우주에서 엄마는
나침반을 보는 기술도,
항해술도,
엄청난 계산 능력도 가졌는데,
이 우주에서는 그게 없어."
그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 우주에서는 그냥 GO!
할 수 있는 거라고.
오래전, 사진 한 장이 있다.
이안이가 11개월 되던 2014년 6월이다. 홀로 배낭을 메고, 유모차에 파란 우산을 하나 묶어 파리로 향했다. 당시 호주에 살고 있던 친구가 상견례 겸 잠시 파리를 지난다고 했다. 친구와 나에게 허락된 건, 겨우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배낭에, 유모차에, 11개월 된 아이까지 데리고 파리로 향했다.
아마도 그날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결심이 거침없어진 것은 말이다. 이후 이도를 낳기 4개월을 앞두고 아직 기저귀를 차던 이안을 데리고 홀로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고, 두 아이와 울릉도, 독도, 삿포로, 스위스, 이집트, 핀란드 그리고 북극점까지 발자취를 남겼다.
두 아이를 만난 우주에선,
나침반도,
항해술도,
엄청난 계산 능력도 필요 없다.
다른 우주에선 이 아이들이 없는 걸까?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르자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우주가 한없이 소중해졌다.
어쩌다 이안과 이도는 타인의 꿈에 나타난 걸까? 그 꿈에서 이안에게 대체 내가 뭐라고 물었길래, 이안은 나에게 저런 말을 들려준 걸까? 이안과 이도를 꿈에서 만난 그 친구가 문을 열고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안이는 타인의 꿈에서도 아름다운 말을 남기네. 비몽사몽에 답이 없는 질문들이 잠과 함께 쏟아졌다. 잠들기 직전까지 내일 일어나면 속도 머리도 맑아져 다시 기운차게 이 우주의 아침을 달리고 싶다고 기도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