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1
사랑아, 엄마는 오늘 갑자기 잡힌 너의 연습경기를 보고 왔어. 겨우 9살인 너와 너의 팀원들이 이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는 모습을 보는 일은 요즘 엄마의 일상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어. 11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걸음마를 시작한 너는, 두 다리에 힘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걸음마와 동시에 공을 차고 놀았지. 아직도 너의 외할머니가 하시는 이야기가 있잖아. 네가 18개월 때 축구공을 차며 노는 모습을 보고 같은 아파트 어른들이 종종 놀라곤 했다는 이야기. 그때의 너는 이미 공을 차고, 공을 쫓고, 공을 주고받기 시작했었지.
아빠를 쫓아 어릴 때부터 재미로 공을 차던 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축구 학원에 가게 됐지. 운동 하나는 했으면 좋겠다는 엄마 말에, 그럼 축구를 하겠다고 답했던 너. 집 근처에 취미로 다닐 수 있는 축구 학원이 있음에도, 이왕 할 거면 어릴 때 제대로 배워놓으면 좋겠다는 엄마 욕심에 ‘선수반‘에 가게 된 너. 사실 처음 너를 거기 보낼 땐, 이 정도로 우리의 모든 생활이 축구에 맞춰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선수반이라고 해도 그곳은 학원이니까. 그저 축구를 잘 배워두면 좋을 거라는 가벼운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너의 일상도, 나의 일상도 모두 축구로 채워져 버렸어.
고백하자면, 엄마는 네가 그곳에 이렇게 잘 적응해서 일 년 가까이 축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낯가림이 심하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경계가 심한 네가 친구 한 명 없는 팀에서 무사히 적응한 것도, 어른들의 말에 긴장을 잘하는 네가 코치님의 불호령을 잘 견뎌내는 것도, 엄마 없이 할머니 댁에서도 자본 적 없는 네가 친구들과 합숙을 해내는 것도, 더위와 추위, 비와 눈을 이겨내며 경기를 뛴 네가 힘들다는 말보다 재밌다는 말을 하는 것도, 여전히 팀원들보다 부족한 실력 탓에 후보 선수일 때가 많은 네가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기보다 친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너무나 놀라워. 엄마가 네게 가르치고 싶었던 많은 것들, 이를테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힘, 어려움을 견디는 인내심, 세상이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깨달음 같은 것들을 너는 축구를 통해 이미 배우고 있더라. 일부러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올해 엄마는 복직을 했고, 너는 더 많은 대회에 나가게 됐지. 너를 쫓아다니며 뒷바라지하는 일과 학교 일을 병행하는 것이 버거울 때가 많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주말마다 지방 대회 일정을 따라다니다 보면 ‘이게 맞나 ‘ 싶은 생각이 절로 들어. 한동안은 ’이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인가‘ 엄마 스스로에게 자주 묻곤 했어.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게 생각하려고. 내가 가르치고 싶어도 가르칠 수 없던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일은 흔하지 않고, 대개는 그런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지. 우연한 기회였지만 너는 그 안에서 배움을 얻어가고 있고, 여러 번 도망칠 기회가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았지. 그렇다면 나는 엄마로서 너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지금 너의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생각보다 빠른 시기에,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나 이제 축구 그만할래”라고 할지도 몰라. 그날이 오면 엄마는 반가운 마음일까? 더는 너를 쫓아 전국을 다니지 않아도 되고, 더위와 추위, 눈과 비를 견디며 그라운드를 뛰는 너를 안쓰럽게 보지 않아도 되며, 주말여행도 자유자재로 갈 수 있게 될 테니 말이야.
그런데 참 희한하지. 그런 날이 오면 어쩐지 서운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단 말이야. 축구를 핑계로 너와 다녔던 지방의 축구장들, 비에 쫄딱 젖으면서도 공을 향해 달리던, 추위와 더위와 싸우면서도 주저앉지 않던 너의 눈빛, 연습 경기가 끝나고 너와 둘이서 했던 조촐한 삼겹살 파티까지. 참 많은 것들이 그리울 것 같아.
결국 이 시간도 다 지나가겠지? 엄마는 요즘 시간이 정말 너무 빠른 것 같아서 두려울 때가 많아. 가끔 모든 것을 잘 해내기가 너무나 버거울 때면, 네가 빨리 자라서 나에게도 자유라는 게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곤 해. 하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일 뿐. 대개는 버거운 삶 속에서도 네가 크는 게 아깝고, 아쉽고, 아리고 그래. 내가 너의 수다 상대가 되고, 내가 너의 큰 그늘이 되는 지금이 너무나 귀하다는 걸 잊지 않고 있어.
그래서인가 봐. 오늘은 정말 제시간에 퇴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네가 연습경기를 한다는 메시지를 받은 후에도 오늘은 갈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엄마가 와줬으면 좋겠어…“라는 너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박차고 네게로 달려갔으니.
네가 살아가는 순간에 엄마는 늘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언제나 네 곁에 머무르며 네가 나를 원할 때, 필요로 할 때, 그게 언제든 너에게로 달려가는 존재.
최초의 너의 편이자, 영원한 너의 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