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1
봄아, 오빠의 경기 일정을 쫓아 우리 둘만의 여행을 다닌 지 벌써 몇 달이 되었네. 오빠는 합숙을 하고 아빠는 동행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둘만의 시간이 생겼지. 변화무쌍한 날씨에, 어른들도 지칠 만한 일정에, 너를 집에 두고 가고 싶은 날들도 있었어. 그런데 너는 어떤 설득에도 꿈쩍 하지 않고 무조건 엄마와 함께 가겠다고 했어. 멀미까지 하는 너를 차에 태우고 보은, 제천, 울진, 담양, 창원, 진천... 벌써 꽤 많은 도시를 다녔구나.
생각해 보면, 너를 두고 가는 것보다 너와 함께 가는 것이 내가 더 좋았던 것 같아. 말로는 혼자 몸으로 가볍게 가고 싶다며 넋두리를 하기도 했지만, 곰곰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건 진실이 아니었어. 두 시간 이상은 떨어진 경기장까지 가는 길, 너와 조잘거리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낯선 도시에서 둘이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작은 모텔방에서 꼭 끌어안고 밤을 새우는 것도, 어쩌다 여유가 생기면 그 도시의 카페를 찾아 맛있는 디저트를 먹는 것도. 모두 너와 함께라 좋았던 일들이야.
이번 여행은 유난히 더 좋았어. 너도 그랬을까? 오빠의 경기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우리 둘이 정말 여행처럼 여유를 누릴 수 있었잖아. 유명한 산속 북카페에서 몇 시간 동안 그림책을 읽고 또 읽은 것도, 서로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연신 "엄마, 여기 너무 예쁘다!", "봄아, 여기 서 봐!" 했던 것도, 너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책을 읽던 것도 모두 정말 좋았어. 날씨가 더운 것쯤은, 차를 오래 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되었지.
이런 날들이 엄마 생에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어. 이 편지를 빌려 처음 하는 이야기지만, 엄마는 정말로 딸이 있었으면 했단다. (네 오빠가 들으면 서운해할까 봐 한 번도 말하지 않았어.) 엄마는 할머니에게 그다지 좋은 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저런 사연으로 엄마와 할머니는 유난히 각별한 모녀지간이었거든. 그래서였을 거야. 그냥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도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절대 그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어. 섣부른 열망이 오랜 소망을 가로채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 같아. 내 노력이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저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고 다짐했었지.
그런데 거짓말처럼.
네가 왔어.
네가 작고 새하얀 새의 모습으로 엄마 꿈에 왔던 날을 아직도 기억해(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엄마는 그 꿈이 너무나 선명해서 꿈에서 깨자마자 태몽이라는 것을 알았지. 새라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엄마에게 '작고 하얀 새'로 온 너라니. 그 새를 품에 안으며, 어쩌면 나의 비밀스러운 소망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어.
네가 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던 날, 엄마는 '내 생에 받을 수 있는 모든 복을 다 받았구나' 확신했지. 사는 동안 더는 그 무엇도 욕심내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었어. 그만큼 기뻤다는 말이야. 열 달의 기다림 끝에 너를 처음 만나던 날도 선명히 기억해. 너의 첫 울음소리도, 첫 눈 맞춤도, 첫 감촉도.
이제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일상을 나눌 만큼 자란 너를 보며 여러 마음이 오고 가. 여전히 엄마는 두려운 것이 많은 겁쟁이인데, 너를 보고 있을 때면 어쩐지 세상에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은 용기가 샘솟아. 꼭 나처럼, 언젠가는 두려운 세상과 마주 할 너에게 근사한 여자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주저 앉고 싶은 숱한 순간마다 너란 존재를 떠올리며 두 다리에 힘을 주는 이유야.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엄마를 더 멋지고 용감한 사람으로, 여성으로 키워주고 있어.
봄아,
이번 여행을 끝으로 오빠의 상반기 대회 일정이 마무리되었으니, 앞으로 두어 달쯤은 둘만의 여행은 어렵겠지? 껌딱지 같은 너를 매달고 다니던, 그 버겁던 시간들이 벌써 그리워지다니. 참 사람 마음이란. 우리 가을에도 둘이서 (오빠 경기를 핑계로) 여행 가자. 다시 돌아오지 않은 너와 나의 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 오래도록 기억하자. 아주 아주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만약 삶이 너를 고단하게 하는 날이 온다면, 지금의 시간들을 펼쳐놓고 그래도 네 삶은 참으로 다정하다고, 꽤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도록.
엄마가 지금의 너를 더 많이
웃게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