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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의 쓰임은 미래의 너에게 있나 봐.

아들에게-2

by 진아

사랑아. 오늘 비가 정말 많이 왔지? 하늘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많은 비가 쏟아졌어. 장마도 끝났다고 하고 아직은 태풍 소식도 없어서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싶은 하루였어. 하천이 범람하고 도로가 통제되고, 아유. 정말 무슨 난리였는지. 오늘 밤에는 비가 좀 그쳐서 큰 피해 없이 지나갔으면 싶구나.


쏟아지는 비를 보며, 엄마가 '요즘 내 마음과 꼭 같은 날씨네'라고 생각했다면 너는 놀라겠지?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가 오기 전까지는 이 이야기를 비밀에 부칠 테니, 아마 너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오늘의 엄마 마음은 모른 채로 지나갈 거야. 그게 엄마의 큰 바람이기도 하고.


요즘 엄마는, 좀 버거운 날들을 살아내고 있어. 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엄마를 덮쳐왔거든. 그것도 작지 않은 일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엄마의 생활을 마구 헤집고 있어. 네가 언제 읽을지 알 수 없는 편지를 쓰면서도 그 일들이 어떤 일인지 쓰기가 어렵구나. 사실 이 편지를 쓰겠다 마음먹었을 땐 그 일들을 하나하나 다 써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너한테 고자질하고 싶었나 봐), 아직은 엄마 안에 그것들을 설명할 언어가 없네.


살다 보면 힘들고 버거운 일을 만나게 돼. 엄마도 그쯤은 잘 알고 있는 나이가 됐어. 불혹을 지났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는 것이 당연한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받아들이게 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생활은 쉽지가 않구나.


십 대 때에는 친구 관계로, 입시를 앞둔 불안감으로.

이십 대 때에는 연애 문제로, 먹고살 걱정으로.

삼십 대 때에는 결혼 문제로, 출산과 육아로.


지금껏 숱한 고민과 갈등, 결정과 후회, 선택과 기회비용 등을 겪고 또 겪었는데도 여전히 삶은 어렵기만 하고 어떤 문제에도 정답은 묘연하기만 하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바른 것인지, 좋은 것인지, 나은 것인지. 그 무엇도 확신하기가 어려워. 확신은커녕, 점점 더 난해해지는 것만 같아.


가끔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원망스럽기도 해. 엄마는 특별한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신이 너무 원망스러운 거야.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준다는데, 왜 엄마에게는 이렇게 큰 아픔을 주는 건지, 왜 엄마를 이토록 과대평가한 건지. 막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어.


그럴 때 엄마를 붙잡아주는 게 뭔지 아니? 바로 너와 봄이의 까르르 웃는 모습이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원망이 고개를 푹 숙인다니까. 감히, 선물 같은 아이들을 앞에 두고 내가 누구를, 무엇을 원망한다는 말인지.


엄마는 모성애가 강한 할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엇비슷한 모성애를 품은 엄마라 될 거라고 확신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 엄마가 느끼는 이 감정은 모성애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어. 너희를 잘 키우기 위해서, 엄마의 삶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거든. 그보다는 내가 너희의 엄마일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한 마음이야. 너희가 커가면서 도리어 엄마에게 위로가 되고, 엄마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어.


너도 그런 날들을 만나겠지? 지금의 엄마처럼, 사방이 문젯거리인데 무엇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매일이 그저 살아내기 급급한 날들. (아, 엄마의 바람대로면 너는 그런 날을 결코 만나지 않았으면 싶지만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을 테지.) 그럴 때 너를 버티게 하는 힘이 선명했으면 해. 가까운 곳에 존재했으면 해. 그게 엄마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사랑아.

엄마는 요즘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하고, 견뎌야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견뎌내라'라는 말에 기대어 살고 있어.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가 한 말인데,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엄마에겐 큰 위로가 된다. 해야 할 일을 하고, 견딜 일은 견뎌내는 것. ‘왜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누가 해야 하지? 왜 견뎌야 하지? 왜 하필 나지?’ 그런 생각들에서 의문사와 물음표를 빼고 나면 '해야 하지'만 남아. '해야 하는 것'을 차질 없이 '해나가는 삶'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또 다른 삶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그게 이 문제들의 정답일 수도 있고, 해답일 수도 있고, 어쩌면 풀이 과정일 수도 있고.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 편지가 도리어 네게 위로가 되는 상상을 해.

'아, 엄마는 사십이 넘어서도 이렇게 흔들리고, 아파했구나. 그래도 우리 엄마 참 씩씩하게 잘 이겨냈네. 내가 흔들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거구나. 이것도 다 지나가겠구나.'

이 편지의 쓰임은 그런 것이 아닐까?

편지의 끝에 닿아서야, 왜 네게 이 편지를 쓰고 싶었는지 깨달아. 엄마의 고난이, 훗날 너에게 위안과 위로가 된다면. 엄마는 조금 더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오늘도 존재 자체로 엄마의 용기가 되는 아들.

고맙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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