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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에게 위안이 되는 날들

아들에게-3

by 진아

사랑아, 엄마는 지금 며칠 전에 요양병원 복도에서 찍은 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 너와 봄이가 나란히 나온 사진을 들여다보는 중이야. 음, 이 편지는 첫 문장을 쓰면서 벌써 울컥, 하는구나.


지난 토요일,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예정되어 있던 증조할머니 병문안을 못 가게 되면서 엄마는 꽤 괴로웠어. 빗길을 뚫고 가기엔 너희를 태우고 장거리 운전을 하는 부담이 컸고, 하지만 그 이유로 증조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부담도 컸어. (증조할머니는 약속 같은 건 기억도 못하시겠지만) 결국 일요일 아침, 비 갠 하늘을 확인하자마자 잠에서 깬 너희를 차에 짐 실듯 태우고 길을 나섰지.


증조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어찌나 청명한지. 비가 개인 하늘에는 구름마저 모난 곳 없이 둥글기만 했었어. 걱정과 염려로 여기저기 뾰족해있던 엄마의 마음마저 다듬어지는 기분이었지. 어쩐지 그날은 증조할머니가 건강하게 엄마를 맞아줄 것만 같더라고. 좋은 예감이랄까. 물론 그 모든 상황에서 '좋은'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도착 전, 어쩐지 엄마보다 네가 더 긴장한 듯 보였어. 사실 너와 증조할머니 사이에는 특별한 서사가 없지만, 이상할 정도로 너는 증조할머니를 잘 따랐지. 친할머니에게도 잘 안기지 않던 네가 증조할머니에게만은 뽀뽀까지 순순히 할 정도로, 참 묘한 사이였어.


병실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 너와 봄이, 그리고 엄마, 할머니가 나란히 증조할머니 침상으로 갔지. 잠든 증조할머니를 깨우자, 증조할머니는 곧바로 우시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네 할머니를 껴안고 왜 이제 왔냐고 등을 쓸고 또 쓸었지. 그 모습을 보며 너와 봄이는 얼어버렸고.


누워있던 증조할머니를 일으켜 너와 봄이를 차례로 인사시키고 엄마도 인사를 했지. 증조할머니는 엄마에게도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며 안고 등을 쓸어주셨어. 엄마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혼이 났단다. 입술을 깨물고 혀를 씹으며, 울지 않으려 애를 썼어. 이건 슬픈 장면이 아니라, 언제가 되어도 그리워질 장면이라고 생각했거든.


할머니가 증조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고 복도로 나오는 사이, 우리가 먼저 병실을 나섰지. 그리고 너는 엄마에게 작게 말했어.


"엄마, 증조할머니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 보여. 아까 눈물이 날 뻔했어."


'생각했던 것보다'라는 말에서 네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증조할머니에게 많은 마음을 쏟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너 역시도 엄마처럼,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눈물로 쏟아질 뻔했다는 것도. 그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마음을 느끼는 사람에게 얻는 위로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어. 엄마는 그게 너라서, 너의 위로라서 참 따뜻했어. 아까 엉엉 울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웠지. 엄마가 울었다면 너도 울었을 테고, 그럼 우리는 너무 슬픈 장면으로 그날을 오래 기억하게 됐을 테니까.


증조할머니는 너와 봄이에게 몇 번이나, "니가 누고?"라고 되물었지. 정말 금방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하는 증조할머니에게 우리는 같은 대답을 처음처럼 하고 또 했었어. 우리의 대화를 모르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참 이상하다며 웃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웃지 않았지. 웃을 수 없었는지도.


병실을 떠나기 어려운 마음이었지만, 너희가 머물 곳도 마땅하지 않고 휠체어에 앉은 증조할머니를 보고 있는 마음도 괴로워서 엄마는 너희와 일찍 자리를 떴어. 증조할머니를 뒤에 두고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여러 마음이 들더라. 나이를 먹는다는 것, 몸이 아프다는 것, 남겨진다는 것, 떠난다는 것,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 등등.


집에 돌아오는 길, 너는 차에 타자마자 "엄마, 어쩐지 벌써 할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섭섭한 마음이 들어."라고 했지. 너는 또 한 번 엄마에게 위로를 건네주었어. 어쩜, 너는 엄마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 말로 표현하는지. 너의 말에 엄마도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었어. 엄마도 같은 마음이라고, 벌써 마음이 먹먹해진다고.


사랑아, 너의 말에 큰 위로를 받은 며칠이었어. 엄마는 네가 내게 준 위로의 말들을 손에 넣고 조물거리며, 증조할머니를 보고 온 마음의 파도를 가라앉혔단다. 그 말들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의 파도가 조금씩 잔잔해졌거든. 공감하는 말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몸소 느낀 며칠이었달까.


울고 들어온 너에게(김용택)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 밑으로 두 손 넣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되작거리다보면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러면 나는 꽝꽝 언 들을 헤매다 들어온 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슬픔의 파도를 건너야 할까. 피할 수도 없겠지만 마냥 넋 놓고 휩쓸릴 수도 없겠지. 그럴 때 우리가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 네가 엄마의 꽝꽝 언 얼굴을 따뜻한 말로 감싸준 것처럼, 엄마도 네 언 볼에 온기를 얹을 수 있는 엄마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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