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은 것이 과했나, 그렇게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런가, 개학이 코앞이라 그런가.
왜 이렇게 속이 더부룩하지…‘
결국엔 소화제를 한 병 따먹고는 자리에 앉아 할머니를 떠올린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들은 어떻게 이토록 삶의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꼭 홀씨 머금은 민들레처럼 삶의 균열이 일어나는 곳마다 뿌리를 내리고 있다가 후- 홀씨 날리듯 과거로 과거로 돌아가게 한다. 오늘을 살기도 버거운 나를 왜 자꾸만 과거로 데리고 가는 건가 싶다가도, 어쩌면 오늘이 버거운 나에게 과거의 그들이 손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소화기관이 약했다. 입도 짧고 양도 적어서 많이 먹는 아이도 아니었는데, 툭하면 체해서는 고생을 했다. 몸에 탈이 나도 위장부터 탈이 났고, 마음에 탈이나도 배부터 살살 아팠다. 매번 소화제를 먹어도 답답하긴 매 한 가지였다. 그럴 때, 유일하게 듣는 약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할머니의 약손이었다.
"할머니, 나 따줘요. 체한 것 같아."
"뭣을 무긋길래 체했노. 저짜 반짇고리 들고 일로와 봐라."
책망인 듯하지만 실은 염려로 가득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때부터 이미 안심이 되었다. '아, 살았다!' 싶은 느낌이랄까. 할머니의 반짇고리를 들고 할머니 앞에 턱, 앉는 순간 이미 절반쯤은 체기가 내려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문득 생각난 건데, 할머니의 반짇고리는 쿠키 상자였다. 파란색 철제 상자였는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꽤 고급 쿠키가 들어있던 그 상자가 별안간 떠올랐다. 그 시절 할머니는 참 여러모로 알뜰했구나.)
"돌아 앉아봐라."
가져오라던 반짇고리를 가져가도 할머니가 반짇고리부터 여는 일은 없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내 등을 두드리고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한참을 그러는 동안 할머니는 꼭 자신의 체기가 내려가는 것처럼 '끄억, 꺼억' 요란한 트림을 했다.
"아니, 할머니! 체한 건 난데, 왜 할머니만 시원하게 트림을 해요."
이 말을 내뱉을 때쯤이면 떼굴떼굴 구를 듯이 아프던 배의 통증은 이미 조금 잠잠해져 있었다. 할머니의 트림 소리를 들으며 볼멘소리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살았다는 증거가 되었다. 나의 볼멘소리에도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더 등을 두드리고 쓸어내리며 트림을 이어갔다. 생각만 해도 시원했던 할머니의 트림 소리!
할머니만의 기준에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할머니는 나를 모로 앉게 한 뒤 다시 한참 동안 팔을 쓸어내렸다. 이때도 트림은 당연한 효과음. 그리고 철커덩, 철제 반짇고리의 뚜껑을 열고는 이불을 꿰맬 때나 쓰는 굵고 새하얀 실이 감긴 실패를 꺼냈다. 오른손 엄지 손가락 아랫마디에 새하얀 실이 팽팽하게 감길수록 윗마디에는 검붉은 피가 몰렸다.
"저~~ 딴 데 봐라잉"
겁이 많던 내가 할머니의 바늘은 왜 무섭지 않았나 모르겠다. 그 날카로움 끝에 맺힌 할머니의 사랑을 알았던 걸까. 할머니가 엄지 손가락의 윗마디를 탁 튕기듯 찌르고 나면 검은 피가 물방울처럼 맺혔다.
"피가 시커먼 기 제대로 체했네! 저짜도 따자."
원래 피가 그런 색인지, 할머니 말대로 제대로 체해서 그런 색인지 판단할 필요는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앉으라면 돌아앉으면 되었다. 왼쪽 손을 할머니에게 내어주고 잠깐 딴생각을 하면 다시 한번 익숙한 듯 낯선 통증이 왼손 엄지를 스쳤다.
그렇게 양손의 엄지 손가락에 훈장처럼 붉고 작은 점을 하나씩 새기고 나면 거짓말처럼 체기가 내려간 것 같았다. 가끔 정말 심각하게 체했을 때에는 열 손가락, 심지어 열 발가락까지 땄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피를 빼는 행위보다 할머니가 한참 동안 등을 쓸어준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싶지만, 이제와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다. 나의 체기를 내려준 것은 모두 할머니의 손끝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니.
할머니가 내려준 체기가 비단 그것뿐이었을까. 소화되지 않던 숱한 삶의 고비들을 할머니의 손길에, 마음길에 기대어 내려왔음을 알고 있다. 가슴 치게 답답한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고 다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남아 있는 할머니의 두드림 덕분이었을 것이다.
지난 면회 때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보았다. 내 체한 등을 두드리던 손, 내 팔을 쓸어내리던 손. 이제는 퉁퉁 부어 주먹도 쥐어지지 않는 할머니의 손. 그 손을 떠올린다. 할머니가 두드려준 덕분에 막힘 없이 여기까지 나아왔다고. 좀 막힌 것 같더라도 곧 길을 찾아 오늘까지 살아왔다고.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배가 아픈 밤에는 유난히 할머니가 보고 싶다.
사는 동안, 오래도록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