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없는 날들이다. 매일 해내야 할 과업은 많고, 물리적인 시간은 적다. 많고 적음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헤매기 일쑤인 날들. 적은 시간을 쪼개고 갈라, 많은 과업을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저녁이 오고, 월말이 오고, 계절이 바뀐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생활에서 의문사를 지운 지 오래되었다. '무엇'을 위해 사는 건지,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묻다 보면 답에 골몰하게 되고 그럴수록 삶은 더 고단해진다. 고민조차 사치인 날들을 살아내고 있으므로. 해야 하니까 하고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것에 내게 주어진 시간을 몽땅 털어 넣어야 한다. 이렇게 사는 건 슬픈 걸까. 아픈 걸까. 어쩌면 다들 그렇게 사는 걸까. 사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둘러볼 틈도 없다. 그저 내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잘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고 만다.
아침이 오면 눈을 뜬다. 아이들의 아침을 챙긴다.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인사를 하고 이것저것 당부를 한 뒤 출근을 한다. 수업 준비를 하고 업무 처리를 한다. 보충 수업을 하고 때론 야간 수업과 자율학습 감독을 한다. 중간중간 아이와 통화를 해서 아이의 안전을 확인한다. 아이의 학원 일정을 조율하고 각종 행사 날짜를 챙긴다. 퇴근을 한다. 아이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을 재운다. 밀린 업무를 처리하거나 글을 쓴다. 잔다. 다시 아침이 오면 눈을 뜬다.
쳇바퀴 도는 삶. 매일 같은 일을 일정하게 반복하는 삶. 육체적 피로는 예견된 일이었으므로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정신적으로는 가장 안정된 삶일 수도 있었는데, 그것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거대한 바위처럼 놓인 갈등의 무게로 일정한 일을 반복하면서도 불안을 느끼고 있다. 갈등으로 인해 시작된 불안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낳고, 신음하는 나는 하루씩 낡아간다.
막연한 슬픔이 비좁은 틈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던 날들, 울지도 못하던 길고 긴 우기.
오늘 학교에서 학생 한 명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은 죽을 때 뭘 남기고 싶으세요?"
학생의 질문에 깊이 고민할 새도 없이 답이 튀어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준비한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아. 그냥 가볍게 떠나고 싶어."
"에이, 그래도 선생님을 추억할 수 있는 뭔가를 남기면 좋잖아요."
"내가 뭔가를 남기지 않아도, 누군가의 기억에는 남아 있을 거야. 남기지 않아도 남는 것들이 더 소중한 것 같아."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 살아내는 것에 몰두하는 지금, 별다른 의미 없이 무사한 하루에 그저 감사한 오늘. 그런 날들에도 누군가의 기억에는 내가 남고 있다. 나란 존재가 남겨지고 있다. 그 생각을 하니, 내가 도는 쳇바퀴 안에서 함께 발을 구르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나와 함께 매일을 살아가고 살아내는 이들. 틈 없이 해내고, 틈 없이 사랑하는 이들. 나의 죽음 이후에도 나를 그리고 기억할 이들.
이왕이면 그들에게 더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다. 더 많이 웃고 더 씩씩하게 나아가고 더 깊이 행복한 사람으로.
그 학생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그저 또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사소한 안도감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오늘 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던 김영민 교수의 책을 꺼내 들며, 내일에 대한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기대라는 감각.
역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을 다짐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김영민)'
내일도 같은 날이 반복될 것이다. 틈은 없을 것이고, 과업은 많은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 나는 죽음을 생각했으므로. 내일은 조금 더 견고한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