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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킴 Aug 23. 2020

영화 속 신발 끈에 담긴 성장의 의미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신발 끈이 없는 신을 골라 신겼었다. 끈이 풀리면 밟고 넘어질 수 있다는 안전상의 이유와 작은 손으로 신발 끈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배려에서 이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손을 잡아주고 끈을 묶어줄 수 있겠지만, 늘 함께할 수는 없기에 미연의 사고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끈이 있음에도 불구, 신이 너무 예뻐서 구매한 적이 더러 있었다. 그때 나는 신발 끈을 실로 꿰매버렸었다. 아이가 아무리 뛰어놀아도 끈이 풀리지 않아 내가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옴팡지게.



그러다 아이들이 스스로 신발 끈을 챙길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딸아이가 토슈즈를 신기 시작했다. 걷고 뛸 뿐만 아니라 쉴 새 없이  점프해대는 신발을 말이다. 토슈즈는 잘 부러지기 때문에 명줄이 짧지만, 바느질에 제법 노동력이 든다. 발목을 잡아주는 고무줄과 양옆에 붙은 리본까지 한쪽 발에만 세 군데에 손바느질을 해줘야 한다. 곧 망가질 신발이지만, 나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촘촘하게 꿰매고 확인 작업을 하곤 했었다. 딸아이는 취미 치고는 꽤 오랜 기간 발레를 했는데, 그때 신고 버린 토슈즈 중 한 켤레가 기념으로 남아있다. 살펴보니 아직도 리본이 튼튼하게 붙어있다.



나의 과거를 회상하니 영화 <조조 래빗>이 떠오른다. 영화 속 엄마는 과거의 나처럼 아이의 신발 끈에 각별히 신경 쓴다. 시대적 배경이 나치 치하의 독일이니, 나처럼 끈 없는 신발을 고를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반복해서 주의를 주는 수밖에. 따라서 신발 끈은 아이가 극복해 내야만 할 과제이다.



즉, <조조 래빗>에는 신발 끈과 주인공 조조의 성장이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자신의 신발 끈을 묶지 못했던 조조가 남의 끈까지 맬 수 있게 되면서 내적 발전도 함께 이루어 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겁쟁이라 놀림받던 조조였지만, 반나치 활동 끝에 죽음을 맞이한 엄마의 신발 끈까지 매 줄 수 있는 강한 소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짝사랑하는 누나의 신발을 매주며 사랑 고백도 한다. 그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는진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조조는 자신의 인생을 잘 헤쳐갈 것이라 확신한다. 신발 끈이라는 삶의 작은 문턱을 넘어섰고, “누나만 곁에 있으면 히틀러도 죽일 수 있다"는 대사까지 날릴 수 있는 강심장을 갖게 됐으니까.



<네모바지 스폰지 >에는 신발 끈 묶는 법을 잊어버린 스폰지 밥이 전전긍긍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질질 끌리는 끈 때문에 햄버거 서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그는 자신의 커리어가 끝났다며 좌절한다. 그래서 그는 신발 끈 묶는 법을 다시 배워 이 난관을 극복하려 하자만, 일이 순탄하게 풀리지 않게 된다. 주변이 모두 신을 신지 않는 해양 동물인 데다, 덜렁이 스폰지 밥에게 신발 끈 매는 레슨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신나는 노래를 통해 그 방법을 익히게 되는데, 이 노래를 따라 부른 아이들 또한 놀이하듯 신발 끈 묶는 법을 배우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소근육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발 끈을 묶는 것 같은 섬세한 작업을 실행하기 힘들다. 따라서 짜증을 내 거나 좌절할 수 있는데, '토끼의 귀처럼,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의 리본처럼, 동그란 고리를 만들어 당기면 신발이 예뻐진다' 노래 가사는 신발  매는 것을 학습이 아닌 재미난 놀이로 탈바꿈시킨다. 아이들은 예뻐진 신발을 신고 일터로 돌아간 스폰지 밥을 보고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했으리라.

 


신발끈을 통해 성장을 이뤄낸 조조, 그리고 스폰지 밥과 다른 예가 있다. <말아톤>의 초원이는 스무 살이 돼서도 다섯 살 지능에 머물러 있다.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달리기만큼은 어느 성인보다도 잘해서 마라톤에 입문하게 되는데, 시합 때 엄마가 신발 끈을 매주어야 한다. 즉, 초원이에게 있어서 신발 끈은 성장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상징한다. 그래서 엄마 없이 달리기를 할 때, 그의 신발은 한쪽 끈이 완전히 풀려있다. 신발 끈을 묶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했으니까.



신발 끈과 관련이 있는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룬 작품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참담한 이혼의 과정을 담은 <결혼 이야기>였다.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했고 한동안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찰리와 니콜은 이혼과 양육권 쟁탈을 위해 싸우다 서로를 시궁창에 빠트리고 만다. 그 과정에서 매력으로 작용했던 장점들은 모두 파국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탈바꿈되고, 서로를 바닥까지 끌어내린 뒤에야 관계가 정리된다.


그런데 왜 부부간의 추한 싸움을 다룬 영화가 나의 픽이 됐을까? 그 답은 <결혼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 이 영화를 두 번 본 나를, 두 번 다 통곡하게 만든 바로 그 장면! 아이를 안고 가는 찰리의 신발 끈이 풀린 것을 본 니콜이 달려가 끈을 매 준 것이다. 이때 찰리는 편안하게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간다. 헤어졌지만 부모의 책임이 있는 그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고, 이를 성숙하게 이행해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남녀의 신발 끈 묶어주는 장면은 의례 로맨틱하게 그려지지만, <결혼 이야기>에서는 안타깝고 슬프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예컨대,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과 이은주 커플이 만들어낸 예쁘고 풋풋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그렇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하고, 또 관계의 성장을 이루어냈다는 점에서는 동일 선상에 있다고 본다.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는 대학 초년생들의 사랑이 시작되고, <결혼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사랑의 감정이 있던 자리에 연민과 배려를 채워 넣으며 서로를 존중하게 됐으니까.


나의 추억을 들추고 영화를 찾아보니, 그 흔한 신발 끈 두 줄이 영화는 물론 나의 삶에서도 의미 있는 등장을 해왔다. 끈 없는 신을 신다 손이 야물어져 스포츠화의 끈을 스스로 묶게 된 두 아이는, 성인이 됐고 둥지를 떠났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신발 끈을 묶고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밴쿠버에 살다 보니 신을 자주 닦을 수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남편의 신발 끈을 다시 매어 놓는 것이다. 신발을 손에 쥐고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내 모습에 남편은 지나치게 감동을 하는데, 덕분에 가뜩이나 닭살 부부로 불리는 우리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오랜 세월 함께 쌓아온 사랑과 믿음에 깊이가 더해진다고 할까? 영화 속 신발 끈이 성장의 메타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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