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훌륭한 당근들로 잘 맥여주시는 팀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정말 제대로 나를 매겼던 내 윗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비슷한 글자, 아주 다른 느낌!
사실 회사에서는 나와 합이 잘 맞고 좋은 사람만 만나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니 그야말로전생에 원수였구나 싶은 사람과 매일 마주해야 하는 괴로운 경험을 하는 분들 상당히 많으실 게다.
말 그대로 정.말. 맞지 않는 바로 윗분이 계셨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어디 나만 불편했을까. 그분도 내가 불편하고 싫은 티를 아낌없이 드러내 주는 분이셨는데, 그런 관계로 무려 4년이나 딱 붙어 일을 해야 했다는 사실도 새삼 대단하지만, 어쨌든 그 시간을 견뎌낸 내가 참으로 기특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쁜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게 더 많은 법. 내 생애를 통틀어 인간관계에 대해 가장 많은 깨달음과 발전을 이뤄냈던(?)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제부터 편의상 A님이라고 부르겠다)
A님은 우리 회사 공채는 아니었다. 중간에 경력직으로 이직을 해오신 분인데, 유치하게 혈통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처음 오셨을 때부터 내 기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다르고 그 다름을 한껏 경험하고 한껏 안고 살아야 하는 곳이 직장이니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우리 사업부를 관장하시는 담당 상무님도 외부에서 영입이 된 상태였는데, 상당히 스마트하고 멋진 젊은 남자분이셨다. 근데 아마도 A님이 어디선가 상무님과 아주 약간의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조직에 들어와 나름 세(勢)를 어필하고 싶었던 겐지 틈만 나면 상무님과 친한 척을 했었는데 뭐 그건 그렇다 치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여기서부터다.
한 번은 우리 그룹의 업무 계획을 상무님께 보고해야 하는 날이었다. (실은 이 A님이 이메일에 소설 쓰시던 그 그룹장이다) 보고를 준비하려면 내용을 함께 공유하고 어떤 부분을 보고서에 정리할 것이며 어떤 방향성을 제시할 것인지 사전에 논의를 해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그럴 기미가 없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A님 혼자 뭔가 자료를 만들고는 있었다. 우리에게 업무 분담을 전혀 나눠주지 않고 혼자 보고서를 준비하기에 그럼 아마도 다 완료가 되면 자료를 공유하고 내용을 알려줄 모양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와 K과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가는 길에 출력해준 자료를 받아 들고 바로 상무님 방에 따라 들어갔다.
자, 그래서 혼자 준비하셨으니 알아서 잘 보고하시겠지라는 나의 생각은 너무 야무졌던 걸까. 본인 자료를 꺼내놓더니말을 시작하려나 하는 찰나에 갑자기 나보고 보고를 하란다. 그러니까 그 안에 '대변'이라고 적혀 있는지 '똥'이라고 적혀 있는지 본 적도 없는 자료를 가지고 보고를 하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 앉아있다는 자체가 좌불안석이었는데 이건 갑자기 무슨 코미디란 말인가.
'헐... 지금 나 매기는 거지....?'
가는 길에 받아 든 자료의 첫 페이지를 넘겨보는 순간, 뭐 당연하게도 그리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자료도 아니었던 데다 본인만 알아볼 내용을 적어놓고 그걸 나보고 보고하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아님 원래 생각이 없어서 그러는 건지 그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내 순발력 테스트 하나? 나의 순간 언어 제조 능력을 보여달라는 건가? 잠시 주춤하던 나는 그저 솔직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내용을 꾸며내며 버벅대기도 싫었고 사실상 꾸미는 일 조차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거 그냥 차장님께서 직접 보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상무님 표정이 안 좋아지셨고 뭣들 하는 거냐며 역정을 내시며 그 해프닝은 아주 싸늘하게 끝이 났다.
어차피 평소 이해할 수 없던 A님에게 맞서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왜 그랬냐고 물어볼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회사를 다니며 그래도 좋은 선배들만 함께 해왔는데, 말로만 듣던 엿 매기는 선배란 사람이 지금 바로 이 사람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행패인가 싶은 분노에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더 웃긴 건 그 이후로 A님도 그 일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나였다면 아마 조용히 불러 상황을 설명하던, 사과를 하던(사과를 요구하던) 뭔가의 조치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 정도로 상식선에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고도 상무님을 찾아가 본인의 입장을 피력하며 아랫것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징징댔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그저 가만히 앉아 '버릇없는 아랫것'이 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조용히 상무님께 왜 그런 상황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팩트만 몇 줄 적고 정중히 사죄의 말씀을 담아 이메일을 보냈다. 상무님이 메일 개봉은 하셨는데 그걸 읽어 보시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살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 하고만 얽힐 수 있다면 인생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고 그 다른 점을 껴안고 맞춰야 하니 괴로움의 연속인 것을.. 그러나 적어도 '성숙한' 인간이라면 인간을 대하는 기본 예의라는 것은 알아야 하는 법인데, 나보다 연장자가 상상할 수 없이 유치한 무기를 꺼내 들 때면 대응책을 알 길이 없어 그저 당황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나도 사람이다 보니 싫은 사람을 필요한 만큼 공적인 선에서 대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상대방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진정성이 묻어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정말 이 불편한 관계를 4년이나 유지하며 내게 가장 가슴으로 와닿은 서양인들의 인용구가 있다.
Do not confuse my personality with my attitude.
My personality is who I am.
My attitude depends on who you are.
(나의 인격(성격)과 태도를 혼동하지 말아라. 나의 인격은 나의 본래 모습이고, 나의 태도는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진다)
A님과의 이해 못 할 수많은 문제들과 앙금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그분을 오롯이 선배로서 예우하고 따르기가 사실상 불가한 지경에 이르렀었다. 후배들의 그러한 태도가 과연 어디서 출발했는지 그녀는 알고는 있었을까. 상대방의 태도를 무조건 탓할게 아니라 어떤 문제의 원인이 나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까. 만일 알았다면 아마 그보다 조금은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을 텐데..
누구나 어떤 문제의 상황에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나'를 먼저 살펴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 더 오래 살았다는 건 그만큼 삶에 대한 깨달음이 더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지혜가 조금은 더 쌓이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는 믿는다. 윗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연륜에서 오는 넉넉한 마음과 배려를 전제로 존중한다는 의미이지, 단순히 세월만 더 챙겼을 뿐 그 행동이 아랫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면 그야말로 무슨 리스펙트가 있겠나.
그 시절 나 역시도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존중받는 선배가 되기 위해 본인의 행동은 어떠해야 했는지 지금쯤은 조금이나마 깨달으셨으려나...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