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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Nov 23. 2020

처절한 현실

첫 학기 세 과목을 몽땅 'Fail'로 장식한 사연

“You all know about the ‘Time value of Money’” 

(모두들 화폐의 시간 가치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비즈니스 스쿨 첫날 첫 재무 수업에 들어갔을 때, 다짜고짜 교수님의 첫마디였다.     


‘응?’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다 아는 눈치이다. 살면서 내가 어릴 때 사 먹던 쭈쭈바가 50원이었는데, 당시에 한 개에 500원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화폐가 시간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는 것을 단 한 번도 개념화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보니, 그야말로 나만 못 알아듣는 세상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건 뭐, 가나다라도 모르는 애한테 책을 읽으라고 내어준 샘이다. 비즈니스 모델링이란 과목은 분석을 위해 기본적으로 통계를 알아야 했는데, 나오는 건 한숨뿐 그제야 내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뿔싸 내가 미친 짓을 한 거구나. 난 누구 여긴 어디.     


인생 살면서 뼈를 때려가며 깨달은 건, 진짜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이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뒤늦게 만기 유학을 택하신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호주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호주의 고등교육 시스템에서는 기본 필수 과목(영어, 수학)을 제외하면 그 외에는 내가 관심 있고 잘할 수 있는 과목을 선택적으로 배울 수 있다. 당시 영어가 그야말로 짧았던 나는, 글자가 딸리면 숫자로 승부를 봐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수학 레벨 중에서도 상위 단계를 선택했었다. 나의 첫 번째 무식으로부터 비롯된 용감한 선택이었다. 이 레벨이 어떤 작용을 하냐면, 학생들이 각자 자기 수준에 맞는 정도로 선택하여 공부를 하되, 최종 대학 입학시험에서 전 학생을 동등하게 평가해야 하다 보니, 어려운 레벨을 선택한 학생들에게는 스케일 조정을 통해 점수를 좀 더 주는 제도가 있는 것이다.     


나는 숫자가 참 약했다. 그래서 자타공인 수포자인데, 어려운 레벨의 수학을 풀어내는 것은, 단순히 푸는 것 자체만 어려운 게 아니라, 그 짧은 영어로 문제를 다 이해하는 것부터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 보면, 수학 시험을 준비해야 할 때는 어김없이 엉엉 울고 있곤 했다. 대학 입학시험을 마친 날에는, 시험장 앞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다시는 수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했던 것이 생생하다.     


그런데 정말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됐을까? 인생은 예측 불가한 것을! 한평생 음악과 함께 할 줄 알았던 내가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 놓인 사연은 이러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짐을 싸 지방 공연을 다녀야 하는 삶이 너무 고단했다. 난 천성적으로 유목민 스타일은 아닌지라, 그런 라이프 스타일을 평생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너무 컸고, 내게는 돌파구가 필요했었다. 나름 절실했던 나는 그간 쌓아온 음악적 경험과 비즈니스를 접목하여 공연계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즈니스 스쿨에 가면 그 해답이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직진을 외쳤다. 그리고는 구구절절한 준비 과정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나의 두 번째 무식에서 비롯된 지나치게 용감한 선택이었다.     


혹시 이 글을 접하실 어떤 공대 언니 오빠들에게는 경영대에서 다루는 숫자는 수학이라 논할 정도로 생각도 안 할 것 같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 10년 만에 다시 마주한 통계는 그야말로 쇼킹하기 짝이 없었고, 경제, 회계와 재무에서 마주한 공식들은 그저 외계어에 불과했었다. 

정말 하루하루 아무것도 모르는 걸 허우적 대며 따라가지도 못하고 끌려가다 보니, 수강했던 네 과목 중 보기 좋게 세 과목에서 모두 F학점을 받았다. 필수 과목들이라 이건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은 없는 것이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는 건지 그저 눈앞이 캄캄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건, 우리 학교에는 같은 코스인데 가을학기 다음 겨울학기가 첫 학기인 과정이 또 있었기에, 나는 그야말로 천운으로 급 재수생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거기서 만회를 하지 못한다면 나는 짐을 싸야 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첫 학기 실패 결과를 접한 뒤 통계 과목 교수님을 찾아가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며 도움을 청했는데, 세상에는 따뜻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저는 너무 다른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출발하다 보니, 이 과정을 잘 따라가기가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점수를 만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을까요?”     


“그러게 너 같은 백그라운드를 가진 학생이 왜 여기를 왔는지 모르겠어. 통계적으로 생각하기에 너 같은 학생들은 결코 이 과정을 버티지 못해. 나한테 와서 울고불고 부탁해도 소용없어. 그러니 그냥 그만두고 학교를 떠나는 게 어때”     


버티지 못하는 나 같은 애들을 많이 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오기가 생기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나’ 같은 애도 있다는 건 모르시나. 교수님의 독설로 한껏 모멸감을 느끼고 돌아 나오며 눈물이 쏟아졌지만 내가 당신이 했던 얘기 반드시 틀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꼭 졸업식장에서 얼굴을 보여주겠노라 다짐을 했다.      


목이 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했다. 그야말로 다음은 없다는 절박함으로 난 그다음 학기에 처절하게 매진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건지, 다음 학기에 만난 교수님들은 모두 따뜻했다. 겨울학기여서 그랬나. 모르면 쫒아가고 질문하고 배우려고 발버둥 쳤다. 동기생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런 모습이 딱했는지 경제학 교수님께서 나를 비롯 살짝 뒤처진 2~3명의 학생을 모아 자신의 연구실에서 따로 과외를 해주는 (정말 말도 안 되게 감동스러운) 영광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다음 학기말 시험 결과를 받았을 때, 생각보다 높은 점수들을 받아 들고 어안이 벙벙했던 기분은 지금 생각해도 나한테는 참 벅찬 느낌이다. 따로 과외해주셨던 교수님께 너무 감사하다며 선물로 CD를 사들고 찾아갔는데, 그때 인자했던 교수님 얼굴이 지금도 떠오른다.      


“잘했어! 다 네가 열심히 한 덕이야. 고맙다”     


누군가는 나를 한없는 지하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지만, 이렇게 또 다른 누군가는 한없는 따스함으로 양지바른 곳에 우뚝 세워 주셨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무사히 필수과목들을 통과했다. 그 이후로도 나의 무모한 도전은 끝도 없는 절벽들을 타고 넘어야만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어쨌든 버티지 못할 거라던 교수님의 말씀에 보기 좋게 끝까지 버텨 냈다.      


생각해보면 이런 나는 참 우리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마흔 중반의 나이에 가족들을 이끌고 뒤늦은 유학을 결심한 우리 아버지는, 매일 새벽까지 공부하며 영어라는 장벽과 늦은 나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으셨다. 아버지의 꾸준함과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나에게는 어쩌면 너무도 무모했던 이 도전이 사실상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려워도 부딪치고 끝을 봐야 한다는 오기 부림도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 그 어떤 것도 미리 단정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길 버티며 살아내 보는 것이다. 무식한 용감함이라도 그렇게 들이대다 보면 또 어딘가에 도달해 있을 것이라 생각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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