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4주년을 맞이하는 삼일절이 내게는 결혼 10주년 기념일이다. 사실 공휴일에 결혼식에 초대하는 것이 하객들에게는 살짝 죄송한 일이 될 수 있는 건데, 그 해 삼일절이 금요일이었어서 여행을 가려거든 잠시 들러 식사나 하고출발하라며 공휴일 결혼에 대한 원성을 잠재울 수 있었다.
나는 남편의 무던하고 한결같음이 참 좋았다. 그 점은 살면서도 장점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한 가지 살짝 아쉬울 때가 있다 한다면, 그는 참으로 한결같이 생일이나 기념일에 깜짝 이벤트로 놀라게 해 준다거나 감동을 날려주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천만다행이라 한다면, 나 역시 그런 걸 크게 기대하지도 않고 또 남편에게 먼저 챙겨줄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보니 그다지 실망할 일도 사실상 없었다.
간혹 이런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가는 일은 종종 있었다.
"여보는 왜 나 꽃 안 사줘?"
"사주면 좋아할 거야?"
"(잠시 생각) 아주 잠깐 좋을 거 같긴 한데.. 생각해 보니 뭐 그때뿐이네~(웃음)"
"여보는 왜 나 선물 안 해줘?"
"응... 뭐 알아서 잘 사잖아..."
"(웃음) 에이~ 그래도 선물은 자고로 모르고 있다가 받아야 맛이지~"
이러고 그냥 웃고 마는 허허실실 대화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10이란 숫자가 주는 의미가 분명 있는 것 같긴 하다. 남들은 10주년이라고 리마인딩 웨딩 포토를 찍기도 하고 조금 거창한 여행을 계획하기도 하던데, 10년 전 결혼식날보다는 후덕해진 모습에 감히 예복에 다시금 몸을 끼워 넣을 생각조차 하기 싫을 따름이고, 거창한 여행을 계획할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니 그냥 조촐하게 우리끼리 축하하고 넘어가나 보다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제 오후 느지막이 곧 있으면 저녁 준비를 시작해야겠구나 생각하며 부엌을 얼쩡대던 중인데, 갑자기 거실에 있는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응? 저거 왜 저러지? 고장 났나?(갸우뚱)'
상황파악이 안 돼서 잠시 어안이 벙벙한 중인데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다른 때보다 조금 일찍 집에 당도한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싶은데 현관에 들이닥친 남편의 모습을 보고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한 손에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다른 손에는 케이크 박스가 있었는데, 더 크게 놀란 건 내가 평소 갖고 싶다고 몇 번 얘기했던 선물을 함께 들고 있는 것이었다.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머릿속에서는 그 찰나의 순간에 대혼란이 일어났던 것 같다. 왜 벌써 집에 왔지? 저게 뭐지? 저 꽃은 나 준다는 건가? 아니 저 사람 왜 저러지? 잠시 후 상황 파악이 된 나는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아마도 아이가 태어나 첫 대면을 했을 때 눈물을 흘렸던 이후로는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 좋은 느낌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보야 갑자기 왜 그래~~(엉엉)"
진짜 좋은 건지 뭔지 어안이 벙벙해 질질 우는 나에게 그가 꽃과 함께 카드를 들이밀었다. 10년을 변함없이 함께 잘 살아줘서 고맙다는 진심 가득 담긴 카드였다. 다 읽고 나는 그냥 목놓아 울어버렸다. 세상에 늘 그리 무던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넘치는 감동을 주다니...
사람은 너무 크게 기쁘거나 행복함을 느끼면 도파민이 분비되는데, 그게 과다해지면 호르몬 분해 작용의 일환으로 눈물샘이 자극을 받아 눈물을 흘린다고 구글에서 알려줬다. 내가 그렇게 크고 과도하게 기쁨을 느낀 거구나, 그 순간의 당혹스러운 행복감을 다시 떠올려보니 그저 미소 짓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이런 엄청난 깜짝 이벤트를 선사해 주다니, 10년을 살고도 이런 구석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저 한결같이 고마운 사람이다.
멋지게 배경 음악을 틀어놓고 등장하려고 현관문 앞에서 열심히 블루투스를 연결해 미리 준비한 음악 리스트의 플레이를 눌렀단다. 그가 현관에 등장했을 때 잠시 음악이 끊어지긴 했는데(웃음) 그래도 나름 미리 플레이 리스트를 고민해 봤다며 줄줄이 흘러나오는 음악도 모두 감동적이었다. 스피커가 고장인가 싶어 어리둥절하게 만든 노래는 'Can't take my eyes off you'였고 연이어 이적의 '다행이다'가 흘러나왔다.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거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전혀 다른 두 남녀가 만나 한 집에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든 과정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힘든 날도 있고, 함께 웃는 즐거운 날이 있는가 하면 감정이 상하는 날도 있다. 마주하는 매일의 삶은 현실 그 자체이기에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너른 아량과 이해심으로 중무장해야 그나마 무난하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게 결혼생활이 아니겠나.
전 세계 80억 인구 중 나와 함께 인생길 나눌 단 한 명의 짝꿍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연애 시절처럼 심장 간질대는 설렘의 관계는 아니지만, 그보다 한층 더 성숙하게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지금의 우리 사이가 사실 더 소중하고 좋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나 얼마나 오래 건강하게 옆에 있어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할 미래가 여전히 기대된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옆에 있어주길, 마주 보고 실없는 농담 나누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길... 당신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