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음식 라면. 사실 길가는 사람 붙잡고 라면 좋으냐는 질문에 싫다고 답할 이가 몇이나 있을까? 건강상의 이유로 너무 과하게 먹지는 않는 것이 좋다 하니 신경 써서 자제할 뿐, 그게 아니라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는 신비한 마법의 음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라면 봉투 뒷면에 적힌 친절한 레시피만 그대로 지켜도 천상의(?) 맛을 내주는데 요즘엔 제각각 개발한 라면 맛있게 끓이는 방법도 세상 가지각색 다양하지 않던가.
나는 라면을 끓일 때 그렇게까지 다양한 재주를 발휘하진 않지만, 그래도 꼭 지키는 것이 있다면 계량컵까지 동원해 반드시 물의 양을 맞춰서 넣는다. 그래야만 해당 라면을 개발하신 분들이 애초 의도했던 대로 정확한 그 라면의 맛이 된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우리 남편은 요리에 있어선 정말 잼병이다. 한평생 요리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해 볼 생각도 안 하고 살아온 사람인데, 그 이유는 그 흔하디 흔한 식탐이란 걸 장착하지 않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래 요리는 음식에 관심이 많고 맛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잘하기 마련인데, 남편은 애초 음식은 그저 배가 고프면 먹는 것이라는 아주 심플한 정의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지난 10년을 같이 살면서 보니 맛있는 음식을 주면 잘도 먹는다. 말하자면 식탐이 아주 없다기보다는 뭔가 음식을 스스로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 극도의 '게으름'을 장착하고 있을 뿐이라는 나름의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와중에 남편이 기꺼이 나서서 만들기를 마다하지 않는 유일한 음식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라면'이다. 원래 만드는 방법이 쉬우니 못한다 할 것도 없는 데다 본인 스스로가 라면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소위 라면 봉투 선생님의 세줄 레시피만 잘 따라 해도 맛있는 게 라면일진대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맛(?)을 낼 수 있는 걸까..
일단 남편이 끓여준 라면은 밍밍하다. 면발에 짭조름한 간이 알맞게 베어야 그것이 라면의 정석인 것을 얼마나 물을 대충 '많이' 넣길래 그렇게 싱거운 맛이 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자고로 백종원 쌤 가라사대 라면을 맛있게 끓이려면 물을 조금 넣으라 하셨다. 그런데, 지구 최대 요리 똥손 우리 남편은 태평양에 면발 한주먹을 넣은 모양새를 만들어 놓는다.
신혼 때는 그런 싱거운 라면도 그저 맛있다며 먹어줬다. 이게 다 우리 건강을 생각해서 그러는구나~ 라며 나의 미각을 속이고 나의 직설화법을 진정시키며 묵묵히 만면의 미소를 띠고 먹었다. 내가 남편에게 얻어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 라면이 유일무이했기 때문에, 아무리 세상 맛없는 라면이라도 내가 나서서 끓이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라면만큼은 영원히 그의 손에 남기를, 굳이 그렇게 지켜주고 싶었다.
세월이 가며 매번 그 건강하기 짝이 없는 라면을 먹는 것은 도저히 안 되겠단 생각에 은근슬쩍 선심 쓰는 척, 오늘은 내가 끓일게 신공을 발휘했다. 역시 이 맛이지~ 적절히 짭조름한 MSG 흥건한 국물과 탱글한 면발에 김치를 얹어 후루룩!
주말 이틀 여섯 끼 돌밥돌밥 상황을 지내다 보면 당연히 피곤하다. 그럼 가끔씩 남편은 나를 도와준답시고 한 끼 정도는 라면을 먹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번 토요일 저녁이 그런 날이었다. 끓이는 일조차도 귀찮아서 아이와 그냥 사발면을 사 먹자 했다. 그런데, 라면도 꼭 끓여 먹는 게 더 맛있다며 편의점에서 남편이 부득부득 봉지라면을 집어 들며 말한다.
"내가 끓여줄게~"
"여보가 끓이면 맛없잖아..."
(나는 더 이상 그 싱거운 라면을 건강한 라면이라고 진실을 속이며 맛있는 척 먹어주던 그때 그 여자가 아니다.)
"에이~ 내가 물 양을 정확하게 맞추면 되지~"
"음..... 그럼 여보가 해줘요....(왠지 불안)"
보글보글 라면 끓는 소리. 온 집안을 감싸는 라면의 향기.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편안함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남편은 냄비째 라면을 상에 내왔고, 우리는 둘러앉아 대접에 각자 먹을 만큼씩만 덜었다.
후루룩후루룩..
"어때~? 맛있어~?"
"................"
나는 그저 먹었다. 이 남자 참 한결같구나 생각하면서..
잠시 후 남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쩜 그렇게 리얼한 표정으로 맛없음을 다 표현해 주냐며...
"나 그냥 사발면 먹는다고 했잖아... 물 정확하게 맞춰준다며..."
"에이 딱 20미리 더 들어갔어~"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20미리나 더 넣고 딱 20미리라고 표현하다니...
아무리 솔직하게 맛없음을 어필해도 그다지 상처받지 않고 본인이 끓인 라면을 만족스럽게 다 먹는 우리 남편. 당신의 한결같음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소. 담부턴 그냥 내가 끓이던가, 그도 아니면 냄비에 정확한 물 양을 담아서 줘야겠다.
남편 덕분에 소식少食했다. 안 그랬음 서로 더 먹겠다고 눈에서 광선이 나갔을 텐데... 혹시 많이 못 먹게 하려는 전략인 걸까... 싱거운 라면이 어쩌면 라면 앞에 쟁탈전 없는 우리 집 평화의 비결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