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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Feb 15. 2023

우리의 N번 째 밸런타인데이

밸런타인데이는 초기 기독교의 사제였던 발렌티누스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알려지기로는 3세기 당시 황제가 미혼 남성들의 군대 입대를 장려하기 위해 군기문란을 근거로 결혼을 금지시켰는데, 성 발렌티누스가 이를 어기고 군인들의 혼인을 성사시켜 주다가 발각되어 순교한 날이라 한다. 하여, 그를 기리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남녀가 사랑을 맹세하는 날로써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 입대와 결혼 금지라니. 요즘 대한민국에선 결혼을 하라 해도 자발적으로 안 하겠다는 사람도 많고, 하고 싶어도 쉽사리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군대에 보내기 위해 결혼 금지란 그저 어이없는 쉰소리에 불과하다.

만일 역으로 결혼하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정책을 내놓는다면 청년들이 앞다투어 결혼하는 진풍경이 펼쳐질 수도 있지 않을까. 묘하게 이리보나 저리보나 진퇴양난의 상황인 듯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밸런타인데이인 줄도 모르고 하루를 시작했는데, 함께 글을 쓰고 있는 글루틴 톡방에서 한 작가님이 오늘이 그날임을 알려주셨다. 알았으니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아쉽다 싶어 작가님들 모두에게 초콜릿 선물하기를 진행했다.(공금으로!) 작고 달콤한 초콜릿 하나가 모두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 수 있다니 가심비 끝내주는 멋진 하루의 시작이었다.


매년 2월 14일이 다가오면 앞다투어 초콜릿 마케팅에 돌입하는 제과 회사들의 수작이라며 한쪽 입꼬리를 들쳐 올리고 비웃어 보지만, 한해도 빠짐없이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집어 들고 카드를 들이미는 내 손은 어째서 내 마음과 협력하지 않는 건지.. 그렇게 나는 늘 자처하 기꺼이 호갱인증을 하고 있다.


그런데 웃긴 건, 초콜릿을 사는 건 맞는데 그게 왜 죄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지는 미스터리다. 초콜릿 선물하라고 있는 날 아니었나?

아차, 나는 남편이 있었지.. 우리 남편은 당뇨 위험이 있으니 초콜릿 먹으면 안 되니까 안 줘도 괜찮다며 아주 타당한 핑계를 만들어본다.


그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 설레며 초콜릿을 예쁘게 포장해 본 적도 있고, 누군가가 들이미는 수줍은 초콜릿에 심쿵해 본 적도 있건만, 이 말들을 찍는 이 순간 진짜 그랬었나 싶게 죄다 남얘기처럼 다가왔다는 건 진심이다. 그 느낌들이 까마득하다. 진정 꿈에서라도 '이준호 정조'가 나타나 달디 단 약과를 들이밀지 않는 이상 나의 연애세포는 영원히 Rest in peace상태에 머물 예정이다. 사실 엄하게 연애세포가 깨어나 누군가에게 심쿵하면 큰! 일! 나는 게 현실 아닌가.(이리 말하나 저리 말하나 결론은, 편과의 심쿵은 어언 옛날 얘기란 의미다)




몇 년 전인가.. 밸런타인데이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쿨하게 말했다.

"오늘 밸런타인데이라네? 일하다가 당떨어지면 편의점 가서 하나 사 먹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하는 나를 보고 남편 역시 그저 웃으며 알겠단다. 우린 이런 게 당연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결혼한 지 10주년이 되는 올해인데, 오늘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정말 너무 전우애로만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뜬금없는 톡을 하나 보냈다.

영혼을 0.7 정도 담았을까?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사랑고백을 할 수 있다니, 나의 아줌마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남편도 이모티콘으로는 예쁜 미키마우스 커플을 찍었지만 실제 블록을 무너트리고 있었을는지는 모를 일이다.


연애까지 도합 12년을 함께 지내고 보니 정말 진하게 우려낸 사골국 같은 관계가 됐다. 이제는 표정만 봐도, 행동만 봐도 얼추 다 안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제거대상 0순위라며 웃는다. 부부간의 사랑은 가슴 설렘이 아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짠해 보인다면 그것은 찐사랑의 경지가 됐다는 의미이다.


연애 시절 사진을 보면 머리숱도 지금보다 더 많고 배도 없었는데, 이제는 제법 빠져나간 머리카락과 아무 거리낌 없이 D라인을 뽐내며 이른 아침 출근길에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련하다. 그래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 저 피곤한 길을 나서는구나 싶어 그렇게 짠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남편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매일 인터폰 화면을 켜놓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남편의 뒷모습을 본다.(알면 무서워할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자빠지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실제 애나 남편이나 자빠질까 봐 걱정되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퇴근해 온 남편에게 미역국을 끓여 저녁상을 차려 주었다. 배불리 먹었는데 초콜릿을 한 개씩 나눠 먹었다. 식후 달콤한 디저트가 얼마나 순식간에 혈당을 높이는지에 대해 익히 주서 들었지만, 오늘은 그냥 눈감아버렸다.

밸런타인 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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