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을 떠올려보자니 사실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그 이유인즉슨, 기억이란 본디 시간이 지날수록 미화되기 마련인지라 당시에는 이불킥을 수만 번 했을지라도 이제와 생각해 보자니 그다지 부끄러울 일도 아니었단 대책 없는 객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전적으로 나이가 들어 생긴 뻔뻔함 같기도 하다)
좀 더 솔직하자면, 당장 5분 전의 것도 기억이 잘 안나 고생 중인데 새삼 예전 언젠가의 쪽팔림을 떠올려보자니 진짜 생각나는 게 없다.
이런 난감한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꽤나 선명한 기억 한 덩어리가 남아 있는데, 이걸 글로 꺼내놓게 될 거라곤 정말 생각도 안 해봤던 나의 흑역사를 한 가지 소개하려 한다. 흑역사라 쓰고 보니 정말 흑색의 스토리이라 한층 더 당황스럽다.
몇 차례 글을 통해 밝힌 적이 있는데 나는 남편을 꽤나 늦은 나이에 만나 느긋하게 결혼에 골인했다. 20대 시절엔 정말 이렇다 할 대단한 연애 기록도 남기지 못한 나는 남편을 만나기까지 찬란하도록 넘치는 소개팅 실패 경험만큼은 다양하게 구비하지 않았나 싶다.
서른을 훌쩍 넘겨 30대가 푹 익어 묵은지가 되어가던 그 언제였을게다. 누가 주선자였는지조차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 어쨌거나 외로운 나를 측은히 여긴 어떤 고마운 양반의 주선으로 상당히 멀끔한 남성과 소개팅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는 키가 크기 때문에 사실 소개를 받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 키를 172.5cm(2022.03월 기준)에 그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172~173cm를 넘나드는 나는 아무리 땅바닥과 절친인 납작 구두를 신어도 대게는 남성분들이 눈높이에 있기 일쑤였다. 눈높이면 다행이지 내심 나의 바람이 하나 있다면 그저 만나볼 사람의 정수리만큼은 목격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퇴근 후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았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소개팅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개팅은 왜 꼭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는지 모르겠다. 나름 분위기가 그럴싸하고 파스타 내지는 피자라는 음식 자체가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비교적 깔끔하게 먹기 좋은 음식이라 그랬을까.이태리 사람들도 의아해할 만큼 넘쳐나는 파스타집에는 누가 봐도 그렇게 처음이라 어색함이 양념으로 올려진 만남을 쉽사리 마주할 수 있었다.
상대 남자분의 신상 정보도 지금은 단 한 가지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다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세상 반갑게 키가 컸고 나름 인상이 서글서글하니 괜찮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그 만남의 시간을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당연지사.
일단 메뉴를 선택했다. 음식을 장식으로 두던 아님 맛나게 먹던 뭘 하건간에 주문은 해야 하니 말이다. 아무리 소개팅 자리라 긴장되고 머리가 평소처럼 차근히 잘 안 돌아갈지라도 경건히 메뉴 앞에서 떠오른 건 밀가루보다는 쌀이 좋잖아~라는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건강한 생각이었다.
나는 자신 있게 리조또를 콕 찍었다. 먹기도 편하고 건강에도 좋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피로 해소 물질인 타우린이 풍부해 간기능을 향상하고 뇌졸중 및 부정맥 예방에도 도움이 되며 비타민E, 아연, DHA 등도 많아 아동과 노인의 두뇌 발달에 도움이 되는 데다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고 소화에 도움을 주는 뮤코다당류가 포함되어 있다는 '오징어 먹물'이 들어간 리조또였다!(구글에서 알려준 오징어 먹물 효능인데, 숨차다)
대화는 그럭저럭 오갔다. 상대 남자분도 꽤나 매너 있게 대해 주시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내일의 출근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정리하고 퇴장하는 게 당연한 수순. 그 순간이 애프터로 이어질 것이냐 말 것이냐까지는 짐작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게 아닐까. 뭔가 파투 나는 사인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애써 모른 척하고 싶었던 나의 속마음 말이다. 레스토랑 밖으로 나오자 남자분께서 친절하게 웃으시며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는 분위기였다.
소개팅남: "저는 그럼 지하철 역으로 가야 해서 이쪽으로 가보겠습니다."
나: "아.. 저도 그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럼 같이 가시죠..(한껏 미소)"
소개팅남: "아... 아아... 예... 그러시죠 그럼...(뭔가 떨떠름한 미소)"
그렇게 끊어질락 말락 하던 만남의 시간을 지하철 역까지 연장시키며 걸었던 기억이 마지막이다. 아마도 지하철 역에서 각자 갈길을 갔겠지.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또 만감이 교차했었을 테다. 실패의 향기를 진하게 맡으며 또다시 외로운 신세를 한껏 타령하며 걸었을지도...
집으로 돌아온 나는 거울 앞에 앉았다. 이만하면 크게 하자(?)는 없는데 왜 나는 잘 안 되는 걸까 속상한 마음이 또 찾아왔다. 한없이 자존감이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또 쭈글 하면 달라지는 게 뭐가 있을까 마음을 고쳐 먹었다.
웃자 웃어! 화알짝!
거울 속에 웬 영구가 한 명 앉아 있었다.
화알짝이 화들짝 이 돼버린 순간.
오. 징. 어. 먹. 물. 리. 조. 또!
그 좋다는 오징어 먹물이 음식에 들어가 이런 테러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했던 그 밤. 다시는 소개팅에서 검은색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진 출처: 구글
인생사 뭐든 첫 시도 한방에 성공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나. 특히나 만남에 있어서, 더구나 평생의 인연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라면 더더구나 실패와 흑역사가 난무하기 마련 아닐까. 처음 만난 소개팅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상황에 뭐라 알려주지도 못하고 그 상황을 참아내느라 그 남자분도 고역이었을 수 있겠으나, 아닐 말로 이어질 연분이라면 이빨에 김이 아니라 고춧가루가 도배되어 있어도 잘 되기 마련이라고 믿는다. 인연이 아니니 그렇게 제 갈길로 가는 것일 뿐.
그 덕분에 이빨에 김을 붙이고라도 마주 보며 낄낄 웃을 수 있는 최고의 반쪽을 만났으니 지난했던 그 모든 과정 역시 감사한 경험일 뿐. 이렇게 나의 영구스러운 흑역사를 만방에 내 손가락으로 다 찍어서 밝히게 될 줄은 몰랐으나 덕분에 현재의 소중함을 새삼 또 깨닫는다. 그날 영구가 없었어서 참 다행이다.
글쓰기로 우주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 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살면서 가장 쪽팔렸던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