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타이틀을 보다가 한국인들이 라흐마니노프를 그렇게들 좋아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프로그램을 주욱 보니 순간 숨이 멎을 듯 흥분됐다.
'아니 그래 이건 꼭 가봐야지 그럼 그럼 이건 놓치면 안 되잖아 인간적으로..'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협주곡 3번, 거기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광시곡)까지.. 이 대단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준다니 어떻게 이걸 안 가보겠나.. 하나만 걸려 있어도 눈이 번쩍 뜨일 마당에 나의 최고 애정 하는 작품이 무려 세 가지나 된다.
망설임 없이 예매 페이지에 들어갔건만, 엄청난 한국인들의 사랑을 고스란히 보여주려는 듯 이미 자리가 거의 차서 없는 상황이었다. 한 자리씩 띄어 앉기를 하려다 보니 원래 좌석수의 50% 수준 밖에는 판매를 못하는 실정인지라, 이래저래 수익을 내야 하는 입장에서도 곤란할 테고 꼭 가서 보고 싶은 관람객도 기회를 놓치기 일쑤니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공연이 열린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하는 세상이다.
살짝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좌석 스캔에 들어갔다. 일단 피아노 협주곡이니 연주자와 건반이 보이는 방향이어야 한다. 거기다 오케스트라 악기가 다 보여야만 한다. 그냥 귀로 들으며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등장하는 악기마다 내 눈으로 봐야겠는 그저 나의 개인적 기호 때문이다. 그리고 소리는 위로 올라간다. 그러니 위층에서 들어야 최적의 사운드를 접할 수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을 토대로 매의 눈으로 좌석 스캔을 마친 후 나는 2층 좌측 S석을 콕 짚었다. 바로 여기로구나!
정말 이렇게나 클래식 음악이 한국인들에게 친근했던가 싶게 콘서트홀을 찾은 관객수는 놀라울 수준이었다. 정말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의미인 건지 나는 잠시 어리둥절함마저 느꼈다. 예매한 자리에 일찍 찾아가 앉아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무대를 바라봤다. 듬성듬성 사람이 들어찬 관객석, 의자만 가지런히 정렬된 오케스트라석과 그 앞에 빛나는 피아노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그는 1873년에 태어나 1943년에 생을 마감한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활약했다. 워낙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9세 때부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수학했는데,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가문이 몰락했고, 이로 인해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지속했다. 그의 활동 초기 작품들은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브, 무소르그스키 등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만의 독특한 음악 스타일을 확고히 정립하였다.
그는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2번(다단조 Op.18)이고, 그야말로 현존하는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고난도 테크닉이라 단언할 수 있는 3번(라단조 Op.30)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라니.. 작품 하나하나가 다 대곡이기 때문에 3명의 피아니스트가 출연하고 각각 한 작품을 연주할 예정이었다.
피아니스트 박종해 님이 첫 번째 주자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코드가 눌러지는 순간 귀는 쫑긋, 머리털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점차적으로 긴장감을 높여가는 연속된 피아니스트의 코드 변화 끝에 치고 들어오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가 시작되자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바로 이거지..
현장에서 듣는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어쩔 줄 모를 정도의 흥분감을 안겨 주었다. 테크닉 적으로는 손색이 없는 단연 국제 콩쿠르 우승자의 위상이 빛났지만, 사실 곡의 해석만큼은 나와는 많이 다른 취향을 가지신 듯하여 아주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사실상 그 누구도 이것이 단 하나의 정답이라고 제시할 수 있는 객관화된 평가 기준이란 것은 없다. 다만 작곡가가 의도하는 바를 악보에 상세히 음악기호로 표시해두었을 뿐이고, 그것에 얼마나 충실하게 연주를 할지에 대한 기준 적용과 해석은 연주자 각자의 생각과 기량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모두의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멘털을 무장해야 사실 아티스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내가 피아노 전공 학도이던 어린 시절엔 그런 사실에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지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연주를 듣고 각자의 해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그게 마치 나의 연주를 폄하하거나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마음에 상처를 입고는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옛 생각으로 잠시 이탈했다 돌아오니 벌써 연주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두 번째 주자는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타라소프였다. 단언컨대 이 분이 이날 콘서트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연주해 주셨는데, 체구가 좀 있으신 서양 남자분이라 그런지 사운드 자체가 파워풀했을 뿐만 아니라, 멜로디 라인의 섬세한 표현이 너무 절묘한 발란스를 이루고 있어 듣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연주자임이 여실히 드러나 보이는 훌륭한 연주였다.
마지막은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해준 러시아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였다. 이분 또한 그렇게도 고난도인 협주곡을 너무도 "아름답게" 잘 표현해 주셨다는 점에 큰 박수를 드렸다. 사실 곡 자체가 테크닉적으로 많이 어렵다 보면 우선은 제대로 연주하기 위한 필살의 노력으로 섬세한 플레이가 다소 아쉬워질 수 있다고 보는데, 이분의 연주는 정말 너무도 '음악적'이었다. 보는 사람마저 힘 팔릴 정도로 어려운 카덴자 부분에서조차 화려한 기량을 마음껏 뽐내주어서 보는 내내 유쾌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숨죽이며 바라봤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의 연주 후 인사중인 모습
※ 카덴자- 흔히 고전 음악 작품 말미에서 연주가의 기교를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솔로 연주 부분
한곡 한곡 연주가 진행되가며 음악에 빠져들어 몰입을 하는 중에 갑자기 들리는 나지막한 소음에 주변을 돌아보니, 옆쪽에 혼자 오신 남자분이 코를 골며 주무시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앞쪽에 앉은 커플 중 남자분도 열심히 인사를 하는 중이었다. 순간 이 시국에 굳이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고 현장까지 와서 단잠을 주무시는 이유는 뭘까 생각하며 쓱 관객석을 스캔해보니 의외로 아주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신 분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훌륭한 명곡이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졸음 유발 사운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사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하는 그들만의 부득이한 사유가 분명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 무거운 게 내려오겠다 작정을 했는데 이 세상 어떤 장사가 이길 수 있으랴...
아주 오랜만에 피아노와의 만남은 너무도 반갑고 신선했다. 게다가 학창 시절에도 가장 좋아하고 많이 선곡하여 배우던 라흐마니노프 작품만으로 구성된 연주회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내게는 각별하고 큰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또 아주 오래전, 그 언젠가 열심히 피아노를 치던 나의 옛 모습을 회상해보며... 다시금 지금 나의 현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