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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Dec 01. 2020

서른여섯에 스파크 튄 그 남자

전 남친 현 남편과 쀼의 세계

"나 있잖아... 한 일 년간 상해 법인에 나가게 되었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테헤란로를 걷고 있었고, 그는 무척이나 뜸을 들이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뭔가 아주 대단히 곤란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나의 반응은 쿨내가 진동하다 못해 시큰둥하기까지 했다.


"어 그래요? 잘됐네...."


"............"

(뭐지 이 반응은? 응? 응?)


당황한 기색이 살짝 엿보인다. 이 여자 속내가 뭔가 싶어 머릿속이 바빴던 듯싶다.

이 상황이 마치 연애 한 10년 차를 찍고 있는 커플의 대화로 보인다면 그것은 노노, 우리가 만난 지 석 달 여만에 나온 이야기였다. 한~창 좋을 때였다.

이 남자는 멀리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가 테헤란로 복판에서 좌절모드 OTL을 구현하며 망연자실 "오빠 나는 어떡해요~~"라고 할 줄 알았단다.






그즈음의 나는 나이 서른에 재차 유학길을 다녀와 또다시 늦깎이 사회 초년생 노릇을 한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딸 하나 있는 게 평생 노처녀 딱지 달고 늙어가는 건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주변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내게 선 보여주는 일에 매진하기 시작하셨다. 꺾어지는 서른쯤 누구나 한 번쯤 해본다는 매주 주말 선보기 랠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 만날 인연이었다면 어째 그 나이까지 못 만났겠냐 해가며, 어쨌든 아무 노력도 안 하고 앉아 내 얼굴 피부가 중력에 충성하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느니 뭐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나 역시 만남에 최선을(?) 다해보았다. 뭐 내쪽에서 별로라 한다면 상대 쪽도 내가 폭탄일 수도 있었겠으나 선보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 분노가 폭발했던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께 엄청난 사자후를 날리고 말았다.


"나 절대 결혼 안 할 테니까 이제 건들지 마세요 진짜아~!! 아으 짜증나 미치겠다고요~!!" (문 쾅!)


그 뒤로 다소 길게(?) 느껴지는 '휴지기'가 찾아왔다. 매주 주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만남의 연속이 뚝 끊어지니 갑자기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께 대차게 큰소리를 쳤으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나의 싱글 라이프를 즐겁게 살아볼 테다 결정했다.






회사생활은 늘 반복적이고 지치는 하루하루였고, 일주일은 그럭저럭 빨리 지나갔다. 그나마 주말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던 건 당시 활동하고 있던 전 계열사 직원들로 구성된 그룹 합창단이 전부였다. 다른 관계사 직원들과의 만남이 아주 신선했고, 더구나 음악 백그라운드를 가진 나에게는 묵혀뒀던 재주를 발휘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적의 취미활동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가던 중 아버지가 조심스레 말씀을 꺼내신다.


"그 말이지... *****에 다니는 청년인데, 나이는 너보다 네 살이 많대고... (구구절절 줄줄줄......)
그냥 한번 만나볼래?"


한 석 달 간의 브레이크를 가졌더니 왠지 혹한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수락을 했다.

(마치 대단한 일을 해드리는 것처럼)







5월 26일 목요일 저녁 7시, 플라자호텔 1층 커피 라운지


'헐... 도대체 지금 시대가 어느 때라고 호텔 커피숍에서 선을 보냐 구닥다리같이....'


그 남자에게서 날아온 문자를 보며 구시렁대었다. 우리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관계로 퇴근 후 여유롭게 플라자 호텔로 향했다. 여자가 먼저 당도해 있으면 너무 목매는 걸로 보이려나~와 같은 쓸데없는 고민은 집어치운 지 오래였던 나는 그냥 회사 문을 나서 발길이 닿는 대로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았다. 7시 목전에서 문자가 온다. 5분쯤 늦겠으니 죄송하다며....


'그래.. 뭐 퇴근시간에 강남서부터 여기 오려면 그럴 수 있지...'


어차피 늦는다니 긴장 좀 풀자하는 찰나 정말 7시 5분에 한 남자가 입구에 등장했다.


'저 사람인가?'


일단 소개팅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멀리서 걸어오는 상대방을 보고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지, 아니면 지금 빨리 '내가 아닌 척'을 하며 난 애초에 여기에 오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건지 고민하게 되는 순간.


그 남자가 웨이터에게 정중하게 뭔가를 묻더니 내 쪽으로 걸어온다. 한걸음 한걸음 점점 더 가까이...

일단 머릿속에 스위치가 '탁' 켜졌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심지어 나보다는 조금 더 커 보이는 키 (키가 큰 나에게는 이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 사람 좋아 보이는데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잘생겼다! (이 느낌은 아주 주관적인 것으로, 평소 내 이상형은 탤런트 지진희 씨였고 그날 나온 전남친 현남편은 그쪽에 가까운 편이라고 해두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만난 남자와 대화를 이어가 본 게 도대체 몇만 년 만이던가. 올레~! 심지어 이 남자 적당히 위트 있고 대화도 통한다. 꿈이냐 생시냐 싶으면서도 정신줄을 부여잡고 최대한 매력 발산을 해보고자(사실 그냥 가장 나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한창 대화가 엿가락처럼 이어지는 중인데,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노라 익스큐즈미 하더니 와서 한단 소리가 폭탄이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응? 뭐라고?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나 지금 까이는 중인 거니?' (머릿속 대혼란)


분위기가 너무 좋았던지라 자연스레 저녁식사로 이어지고 그렇게 해서 애프터가 꼬리를 물고, 뭐 이런 상상을 했던 나는 머리가 댕~ 했다. 역시, 내 맘에 드는 남자는 다 그림의 떡이었어 라며...


찻값을 지불하고 나오는 남자가 묘한 힌트를 날린다.


"다음에는 랍스터 한번 쏘시죠~!" (대화중에 나왔던 음식 이야기...)


'어라 이거봐라. 나 까인 건 아닌가 보네'(안도의 한숨)

사실 뭔가, 주도권이고 뭐고 자존심이고 뭐고, 내 나이 서른여섯에 물불을 가리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는 게 현실이었다. 어쨌든 주책없이 안도하는 내 모습에 아주 잠시 자괴감이 찾아올 뻔했으나 기분 좋게 내가 먼저 문자를 날리는 막무가내 용기를 발휘했고, 그 뒤로 우리의 만남은 이어져 갔다.


그날 이후 불과 한두 주 사이에 나는 연달아 콘퍼런스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두 건이 모두 하필(?) 그 남자 사무실이 있던 삼성동에서 열렸다. 마침 '콘퍼런스 참석차 근처에 왔는데 지나던 길이었던 나'는 그 남자에게 자연스레 문자를 보냈고, 그는 일이 바쁘다면서도 잠시 내려와 차 한잔 나누고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센스를 발휘해 주었다.






"나 중국에 간다고... 괜찮아?"


"아니 뭐, 중국이 비행기 타고 열댓 시간 가는 곳도 아니고, 겨우 1년 가는데 그게 뭐 어때서요.. 요즘같이 통신 발달하고 비행기 안 가는데 없는 세상에... 뭐... 떨어져 지내면 문제 있나...."


남편이 나중에 해준 얘기인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이야.... 얘는 진짜 장부구나....'


우리가 비록 '선봐서 만난 사이' 지만, 얼추 맞춰보고 문제없으면 서둘러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애초에 둘 다 없었고, 각자 직장생활이 바빴던 터라 사실 주중에 만나는 일은 가뭄에 콩 나듯 한번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주말에 한번 만나 남들처럼 영화, 공연도 보고 걷기도 하며 데이트를 즐겼고, 주말 중 하루는 각자의 휴식과 여가가 필요하다는 데에 아무런 이의 없이 암묵적으로 합의가 된 상태였다. 늦깎이 연애에 유난을 떨고 싶지 않다며 뭔지 모를 쿨함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어차피 들대로 들어버린 나이인 데다 세월에 쫓겨 서둘러 가야 할 필요도 못 느꼈다. 그렇기에 1년간의 중국행은 그다지 큰 문제로 다가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을 얼굴 보는 사이면서 전화 통화에도 목숨 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우린 또 그렇게 쿨하기 짝이 없었다. 문자 톡에 '1'이 사라지지 않으면 '왜 안 봐!' 라던가, 읽고 답이 없는 '읽씹' 이라며 초조해하던가, 이런 건 애당초 없었다. 안 보면 바쁜가 보다, 보고 답이 없으면 나중에 말하겠지... 이 무슨 자신만만함인 건가 싶지만, 늦은 나이의 연애는 뭔지 모르게 그렇게 여유가 있었다.


그 남자는 상해로 향했고, 우리는 한 달에 한번 그가 한국에 왔을 때 접선하는 현대판 '견우와 직녀'가 되었다. 대신 크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우리의 하루는 매일 밤 1~2시간에 이르는 '화상통화'로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 1년간 나눈 대화가 우리가 결혼하고 지난 8년여간 나눈 대화보다도 더 방대하고 많았던 것 같은 느낌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상형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언제나 주저 없이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이상형을 찰떡으로 만났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헤매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다 필요 없고 정말 대화가 되는 사람을 만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쌓아갔고, 그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이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져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때 왜 일어나자고 했어?"


"아... 네가 자꾸 시계를 보더라고... 바쁜 일이 있나 보다 했지..."


"에에~?? 난 그냥 시간 체크하는 게 습관이었어.. 하도 대화도 잘 통하고 분위기가 좋길래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 봤을 뿐인데 나 때문에 그랬다고?"


우리는 가끔씩 맥주캔을 기울이며 옛날 얘기를 나누곤 한다. 주거니 받거니 기울이는 한잔 속에 살면서 서로 하기 어려웠던 얘기를 꺼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며 아직도 서로를 배워가고 있다.

지금도 우리 남편이 열렬히 주장하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자기한테 홀딱 반했다는 것이다.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으나 우리는 서로 그 반함의 주체가 나네 너네 해가며 우김질을 한다.


"너 콘퍼런스 참석 때문에 삼성동 왔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잖아"


"허얼.. 아니거든? 진짜로 콘퍼런스 간 거 맞거든?? 왜 이러셔~"


그렇게 믿어서 뿌듯하시다면 맘대로 생각하시길... 이렇게 한 발짝씩 놔주는 게 부부가 평안한 길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도 남을 시간을 보냈으니까..


최근에 알게 된 충격 반전이 있는데, 상해에 있을 당시 화상통화를 할 때 네트워크가 너무 느린 곳이라 대화의 반 정도는 끊겨서 알아듣지 못할 지경이었단다. 세상에나... 그런데 난 이 남자가 참 경청을 잘해준다고 믿고 있었으니, 나만의 착각이 기반이 되어 지금의 우리가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 (뭐지 이 억울함)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연분이긴 한가보다. 남녀의 사랑이란 게 결국은 눈에 뭐가 씌운 상태, 그야말로 상대에 대한 나의 해석을 기반으로 발전하지 않던가. 그래서 같이 살다 보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마주하는 현실에 당황하게 되는 것일진대, 그 착각의 기전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는 연인들의 만남과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지 싶다. 착각으로 시작해 현실로 가는 사이. 당신을 만나 착각에 빠진 걸 감사하며, 오늘도 우리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한다.


'오래오래 같이 걸어갑시다...'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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