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의 한 복판에서 아버지가 불혹의 딸에게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우리 가족은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뜩이나 공부가 지겨운 청소년기에 그저 해외에 살면 모든 것이 거저 되는 줄로 알았던지, 엄청난 모험을 감행하는 부모님의 걱정 근심과는 상관없이 나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공기업에서 안정적인 위치에 계시던 아버지 덕분에 내 어린 시절은 비교적 부족함을 몰랐었다. 그러다 내가 5학년쯤 되었을 때인가, 이런저런 풍파로 직장에서의 위기를 맞이하셨고, 결국 그 직장을 떠나게 되셨더랬다. 그 후 뭔가 다른 일을 찾으시긴 했으나 전처럼 안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마흔 중반의 나이에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호주로 유학을 결정하셨다. 아버지의 바로 위 형님 가족이 호주에 살고 계셨기에 그 나라로의 이주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아버지는 학위를 따기 위해 학과정을 동분서주 알아보시다가, 결국 단과대학에서 무엇인가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신기술 관련된 공부를 하셨더랬다. 지금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책 한 권을 읽어도 집중이 잘 안 되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은데, 그 나이에 영어로 새로운 공부를 하시다니, 지금도 정말 우리 아버지의 무모함과 대단한 용기에 진정한 기립박수를 보내드릴 따름이다.
오빠와 나는 학교에 다녀오면 TV를 보거나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를 녹화하여 빌려주는 비디오를 빌려다 보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매일 학교에 다녀오시면 그날그날 새벽 1시가 되도록 공부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매일같이 아버지의 노트에는 빼곡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아마도 본인이 이해 가능한 선에서 열심히 메모를 받아 적고 집에 돌아오시면 다시 복기해보며 배운 내용을 상기시키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셨던 모양이다.
어찌나 열심히 하셨던지,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커피를 마시는데 입 옆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이다. 너무 놀라서 보니, 세상에 얼마나 무리하고 공부를 하셨으면 그 스트레스로 인해 입이 돌아가는 구안와사가 왔던 것이다. 천만 다행히도 당시 알고 지내던 한국분이 한의사 셔서 그분께 침을 맞고 치료를 받아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왔더랬다.
아버지는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셔서 다시 취업에 성공하셨다. 오랜 기간 독일계 회사에서 일을 하시다가 이후 후배가 창업한 벤처회사에서 기술 총괄로 제품 개발에 오늘까지도 전념하고 계신다. 아버지 연배 주변을 보면 이미 너무나 진즉부터 은퇴를 당하시고(?) 집에 계시는 분들이 참 많은데,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매일 아침 출근을 하신다. 심지어 아버지가 핵심기술을 담당하시기 때문에 모든 중요 결정을 맡고 계셔서, 이제 그만 놓고 쉬시라고 해도 놓지도 못하신다.
아버지가 혼자되신 게 벌써 11년 전이다. 아버지가 혼자서도 그 시간을 버텨오신 건 그나마 다행히도 지금의 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문제가 안 풀려 고심하실 때 보면 이제 그만하셔도 되는데 싶은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그게 아버지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자식으로서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인듯하다. 나는 매일 가는 운동도 가끔은 꾀가 나서 빠지는 날도 있는데, 우리 아버지는 매일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간단히 식사를 하시고 반드시 운동하러 집을 나서신다. 그 운동을 하루라도 거르시는 날이 없다. 정말 돌쇠형 인간이라며 농담을 하지만, 그 꾸준함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아버지가 모험을 감행하시고 20년이 지난 후, 나 역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을 거쳐 평생 나와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세상에 발을 디뎠다. 그 여정 끝에 사회에서 한창이던 난 뒤늦은 결혼과 그보다 더 늦은 임신 출산을 겪었고, 정확히 1년간 워킹맘 생활을 했다. 처음에 아이 봐주시는 이모님을 잘못 들여 안 좋은 꼴도 봤지만, 두 번째 모신 이모님이 아이를 너무 예뻐하시고 내게는 정말 친정어머니만큼 좋으셨더래서 아주 마음 편히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회사에서 늦어지면 이모님도 퇴근이 늦어지는 거고, 그럼 다음날로 여파가 가니 결국 우리 아이를 봐주시는 게 힘들어지는 그런 연쇄작용의 관계 아니던가.
회사에 자율출근제가 시행되었던 덕분에 나는 일찍 출근을 하고 남편은 이모님이 오시면 출근을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였다. 나는 언제나 5시에 칼퇴근을 했다는 것. 일이 많을 때는 점심시간에도 일을 하거나 출근을 더 일찍 해서 기한을 맞추는 것으로 최대한 내 업무에 충실하도록 애썼다. 적당히 눈치 봐가며 야근도 간간히 해주고 회식도 끝까지 참석하고, 이게 바로 직장인, 아니 워킹맘의 정석일진대, 나는 참 성격이 대쪽 같아 내 신념대로 행동을 한 것이다. 나는 아이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다고 일하는 엄마 중 누군들 아이가 중요하지 않을까마는 나는 생각대로 밀고 가는 거 하나만큼은 세계 일등이었다. 눈치 따위는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둔 지 오래였다.
내가 아무리 할 일을 제때에 마쳤더라도, 매일 5시면 사라지는 나는 그저 일이 없는 애엄마라는 낙인을 찍기에 너무 만만하고 뻔해 보였나 보다. 그런 인식은 평가로 이어지고 나는 그렇게 점차적으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회사 형편이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들어내는 게 마케팅이라고,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 대상에 포함이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엔 큰 고민 없이 내 몫을 모두 챙겨 뒤돌아 나왔다. 거기엔 나의 엄청난(왜인지 알 수 없는) 자존심이 들썩였고, 난 언제나 Plan B 가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자신감이 작용을 했던 것 같다.
다른 직장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크게는 안 했다. 비교적 워킹맘들이 일하기가 좋은 조건이라는 우리 회사에서도 어쨌든 칼퇴근이 몹쓸 낙인이 되었는데, 다른 데를 간들 뭐가 다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가끔 늦어질 때 1~2시간만이라도 SOS를 칠 수 있는 친정엄마의 부재가 그렇게도 원망스러웠었다. 아마도 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친정엄마의 도움을 못 받아서라고, 그렇게 탓을 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난 그 후로 전업맘이 되었다. 물론 뭔가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그리고 동글동글 이름도 예쁜 ‘경단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처음엔 내가 집안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조차도 왠지 모르게 좀 화가 났었다. 왜 남편에게 안도와 주느냐며 큰소리를 치기도 미안해졌다. 왜냐하면, 전업이란 그야말로 이게 내 일이 되었단 뜻이니, 웬만하면 군소리 없이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이었지만, 늦은 나이에 체력이 달리는 사실 쉽지만은 않은 육아였기에 수도 없는 감정의 널뛰기 속에 나를 겨우 다스리며 지내온 날들이 허다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식사를 하다 내 푸념을 쏟아 놓았다.
“아부지.. 난 다시는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참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지금의 내 모습이 낯설어요. 모든 게 갑자기 멈춰있는 거 같아 갑갑하고, 다음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네요.. 후우.....”
솔직한 지금의 심정이었다. 무모하게 도전하고 산을 넘어봤던 나로서는 무엇이든 내가 밀어붙이면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식”이라는 큰 인생 과제를 얻은 이후로는 그 어떤 것도 오롯이 나 혼자로서만 결정하고 일을 저지르는 게 생각처럼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무엇인가를 용감하게 저지르기엔 리스크가 너무도 커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나는 아이조차도 그저 하나의 핑곗거리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너 이제 중년인데 인생 다 살았냐.. 자꾸 두드리고 찾아봐..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이는 법이야...”
어쩜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답 이건만, 아버지의 그 말씀에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건 아마도 그 교과서의 정석을 아버지 본인의 삶으로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이리라.
나는 내 아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나도 그렇게 인생 마라톤을 끝까지 완주하는 꾸준한 엄마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