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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Dec 09. 2020

늦깎이 엄마의 칠전팔기 임신 성공기

마흔에 만난 내 소중한 보물

임신테스트기에 두줄을 본 후 나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너무나도 쉬크하셨던 선생님은 아주 선명하게 또박또박 말씀하신다.


"초산에 노산이시군요"


일단 초음파를 보자며 들어간 선생님 반응이 가 좀 그렇다.

"주수로는 8주 정도인데 태아 심장이 너무 약하게 뛰네요.. 내일 한번 다시 와서 봅시다"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늦은 나이의 결혼에 뭐든 그저 순리대로 가자며 임신을 계획하고 있지도 않았던 혼초에 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빨리 임신이 가능할 거란 생각도 못했지만, 임신에 있어 뭔가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저 아이는 생기면 낳는 줄 알았다.


일생일대 임신이라는 대사건 앞에서 회사 휴가까지 낸 하루였던지라,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저 노심초사 걱정 속에, 아주 잠시 뭔가가 잘못된 일이었을 거라며, 분명 내일 병원에 가면 상황은 달라져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랬다.


다음날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땐 오히려 상황은 나빠져있었다.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계류유산'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태아가 세포분열을 일으키던 중 그 어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더는 발달이 불가한 상황에서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이란다. 그러나 뱃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일말의 단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유산의 일종이었다. 임신이란 사실에 얼떨떨 아주 잠시 놀랍고 설레기도 했던 그 기분은, 그렇게 계획에 없던 수술로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 첫 임신에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일이라잖아.. 얼른 몸부터 추스르고 다음에 잘 되면 되는 거지.. 걱정하지 마"


남편은 위로를 했지만 이 어이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내가 나이가 많아서 이런 문제가 생긴 건가부터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있나까지 별별 생각이 다 스치고 지나갔다. 아닐 말로 별 계획도 없고 생각도 없던 시점에 덜컥 임신이 되었기에, 세상 무슨 아이가 이렇게 쉽게 생기냐며 입방정을 떨었던 나를 자책했다. 임신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늦은 나이'라는 것도 사실 난 크게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냥 늘 그러했듯, 내가 하면 다 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참 우스운 것이, 애초에 생각도 없던 일에 '실패'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 보니 이 설욕(?)을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 내가 준비가 안됐었던 거니까.. 이제부터 음식도 건강하게 잘 챙기고 운동도 하면서 다음을 준비해보자'




내가 또 누구이던가. 목표물이 생겼다 하면 달려가야 맛인 줄 아는 용감무쌍 인생 아니던가.

그때부터는 건강한 임신을 위해 나한테 필요한 건 무엇인지, 왜 유산이 되는지, 어떻게 임신을 준비하면 좋은지 찾아보고 읽고 익히기에 힘썼다. 언젠가 유행하던 '키스를 글로 배웠어요' 카피처럼, 글로만 배운 게 실전 적용에 모두 유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할 수 있는 시작은 그거였으니 뭐라도 열심히 해보잔 생각이었다. 난생처음 배테기(배란테스트기)라는 것도 사보고, 그게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는지도 열심히 귀동냥을 했다.


그런데,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참 희한하게도 아기는 목을 빼고 기다리면 안 온다. 그 언젠가 둘째를 애타게 기다리던 친구가 그야말로 별의별 짓을 다해도 안 생기더니 진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순간 둘째가 찾아왔단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내가 너무 목표의식에 충실했나? 어쩜 이렇게 애가 안 들어서나.....'

태연한 척하려 해도 내심 초조해하며 한 달 두 달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대략 석 달이 지난 후 다시금 홈런을 쳤다. 애타게 기다리던 만큼 한 5주밖에 안됐을 시점에 이미 테스트기를 통해 결과를 알게 되었고, 7주는 되어야 태아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즈음에 맞춰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이번엔 멋지게 성공하는 거야'라는 굳은 결의와 기대감에 더불어 내심 불안한 마음도 감출 수는 없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선생님 얼굴이 또다시 어두워진다. 이번에도 계류유산이었다.


"선생님... 왜 자꾸 그런 걸까요?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그 원인은 아무도 알 수가 없어요.. 원한다면 엄마 아빠의 염색체 검사를 할 수도 있지만, 만약에 둘 중 누구라도 염색체에 문제가 있다면 애초에 지금처럼 아무런 이슈가 없는 사람일 수가 없는 거거든요.. 원래 임신 성공률은 30%에 지나지 않으니, 지속적으로 시도해보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기운이 쭉 빠졌다. 뭐라도 원인을 알아내고 싶은 나머지 이번엔 태아 염색체 검사까지 의뢰했다. 결과지를 받아 들었을 때는 예상대로 염색체 하나가 이상을 일으킨 상태였는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아무도 밝혀낼 수가 없다는 게 답답할 노릇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쨌든 3번 연달아 실패할 경우 좀 더 정밀한 검사와 진료가 필요할 수 있다고는 하셨지만, 이미 두 번이나 애 낳은 것도 아닌데 몸만 축나는 유산을 경험하고 나니, 향후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알 수 없는 성공률에 베팅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선생님께 이런 나의 생각을 밝히고 '습관성 유산' 진료를 받아보겠다며 의뢰서를 받아 C병원을 찾았다.




습관성 유산과 시험관 시술에 권위자였던 담당의 선생님은 인자하게 말씀하다.

"제가 보기엔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는데요.. 일단 자연임신을 한번 시도해 보도록 하죠..."


임신이 되면 다시 찾아오라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두 달여 후 다시금 진료실을 찾게 되었다. 딱히 문제는 없는데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이번에는 6주가 되었는데 난황이 안 보인단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거란 말인가. 또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그야말로 이건 쓰리아웃 체인지의 순간이었다.


"선생님, 저 시험관 해보겠습니다"


유산에 관한 이런저런 문제의 가능성을 설명해주시는 선생님께 나는 무 자르듯 단호하게 내 뜻을 밝혔다. 남편과 내 염색체 검사 결과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그야말로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가 안 생길 때까지 무턱대고 시도해보기엔 나이도 많았고 몸도 축나는 일이었다. 이건 될 때까지 해봐야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후우.... 이 주사 매일 배에다 맞아야 한데... 내가 내 배에 이걸 찔러 넣어야 한다니..."


양쪽 난소에서 난자를 과배란 하기 위해 맞아야 하는 호르몬 주사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맞아야 하기에, 아침 출근 전 7시엔 어김없이 주사기를 집어 들어야 했다. 남편은 차마 못 보겠다기에, 그냥 나 혼자 해치울 테니 나가 있으라 하고 침대 위에 앉았다. 첫날은 정말 주사기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심지어 주책맞게 갑자기 눈물이 막 흘렀다.

'하... 이걸 어떻게 찌르지...'

벼르고 벼르고 또 벼르다가 눈을 질끈 감고 '푹~!' 찔렀다. 근데 이게 웬일? 아무런 느낌이 없다. 주삿바늘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기도 했지만, 배에 아쉽잖은 인덕(?)을 품은 내 몸 덕분이리라. (뭐든 다 쓸데가 있다)


난자가 건강하게 잘 자라려면 단백질 섭취를 잘해줘야 하고, 걷기 같은 가벼운 운동을 열심히 해주면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말에, 그리도 좋다 하는 추어탕을 입에 달고 살았고 기회만 생기면 멀다 생각 않고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보름쯤인가 내 배를 쑤셔댄 결과 난자들이 잘 자라난 것을 확인 후, 채취 전날 정확히 시간을 맞춰 난포 터지는 주사를 맞으러 밤늦은 시간에 응급실을 방문했다. 마치 무슨 게릴라 첩보작전같이 정확히 시간을 맞춰 몸에 무엇인가를 한다는 게 좀 신기했다.


임신이란 미션에 뛰어든 이후로는 내내 나의 '나이'가 정말 엄청난 결격사유나 되는 것처럼 왠지 모를 죄책감(?)을 갖게 되곤 했는데, 불혹 목전에 두고도 건강한 난자를 11개나 얻었더랬다. 선생님은 난자 정자 상태가 다 너무 좋다며 아주 기분 좋게 희망적인 말씀을 해주셨다.

이제 그 애들이 만나 수정이 되면, 내 자궁에 옮기는 작업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자궁도 상태가 좋고 건강하다 하셨다. 물론 시험관이란 게 단번에 성공하기가 어렵기에 수차례 도전하는 불굴의 엄마들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난 금방 잘 될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있었다.


"11개 중에 상태가 아주 좋은 배아가 3개가 나왔고, 그다음 괜찮은 게 3개가 있어서 냉동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나이가 있기 때문에 3개를 이식할 예정입니다"


일단 선생님의 밝은 표정과 목소리에 이건 분명 아주 잘되는 일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생겼다.




그렇게 배아 이식을 받고 대략 일주일 정도의 착상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맘을 편하게 먹고 기다려야지 해도 그 어떤 합격을 기다리는 일보다 피가 마르는 일이었다. 하루가 마치 백 년 같은 기다림 끝에 나는 병원에서 액검사를 통해 임신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임신이 안돼서 고민이었다면 성공적인 착상부터가 기적의 뉴스였겠지만, 사실 그게 고민인 건 아니었다 보니  그다음 기다림이 더 조바심이 났다. 태아의 건강한 심장소리를 들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안정적인 착상부터 태아가 자궁에 잘 정착해 자라날 수 있도록 매일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야 했는데, 감사하게도 처음 진료를 봐주신 집 근처 산부인과 선생님께서 본인 병원에 약만 가지고 오면 놔주겠다며 큰 배려를 베풀어 주셨다. 석 달 간을 매일같이 그 병원에 드나들었는데, 이 주사가 엄청 아픈 데다 맞고 그냥 방치하면 근육이 다 뭉쳐 딱딱해지는 골칫거리였다. 하여 남편은 매일 내 엉덩이를 마사지해줘야 하는 일과가 생겼었는데, 온몸에 주사를 찔러대 가며 '우리의 아이'를 갖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마당에 아내의 엉덩이 주물러 주는 일쯤이야....(시험관에 있어 남편은 '거의' 하는 일이 없다. 정말로!)




6주 차 검진에 갔을 때 사실 아직은 심장소리가 잘 들릴 시기는 아니라고 알고 있어서 여전히 조바심을 안고 초음파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번 들어보자며 선생님이 스위치를 켜시는데 세상에나.... 이게 무슨 공사장 중장비 소리인가 싶게 쿵쾅쿵쾅, 그 조그만 태아의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었다. 그때의 놀랍고 신기한 기분은 정말 뭐라 형용할 길이 없었다. 그저 어안이 벙벙...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고 나와 그제야 현실로 생각이 돌아왔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 소리였구나...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소리가 바로 이 소리였구나....'


그 콩알만 한 아이가 나 이렇게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힘차게 알려주고 있었다.




"우리 딸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보~물!!"


그 우여곡절의 스토리를 담고 태어난 우리 딸이 지금 여섯 살이다. 콩알만 하던 태아가 49cm의 신생아로 태어나 또래보다 머리 하나만큼이나 더 큰 건강한 아이로 자라기까지 참 정신없이도 세월이 지났다. 나는 그렇게 마흔의 시작을 출산과 함께 했다. 늦깎이 출산과 육아는 그야말로 매 순간이 엄청난 체력을 깎아먹는 인고의 세월이었지만, 이제는 컸다고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되는 아이를 보며 언젠가 손잡고 같이 공연 관람하러 가고 싶은 나의 로망을 떠올려보곤 한다.


이 아이는 어떤 아이로 자라날까... 내가 그리 썩 괜찮은 엄마 노릇을 해내고 있다는 자신감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사랑해주는 이런 귀한 존재가 있다니, 감사가 넘치는 하루하루이다. 그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존재,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은 존재, 속상하다가도 금세 그 마음을 잊게 만들어주는 존재, 자식을 낳고서야 비로소 진짜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됐다. 이 아이를 통해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도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간다. 그렇게 나는 철들고 성장해 가고 있다.


"네가 있어서 엄마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 네가 엄마 딸이라서 너무 행복해..."


매일 이렇게 말해주며 우리는 껴안고 뒹군다. 이런 꿀 행복을 맛보게 되다니... 

넌 찐이야 정말! 


우리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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