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학제는 크게 4개의 term(텀) 이 있는데, 두 개의 텀이 묶음으로 하나의 semester(쎄메스터) 가 된다. 그리고 한 개의 텀이 끝날 때마다 짧게 브레이크가 있었고, 한 쎄메스터가 끝나면 길게 방학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호주에 도착해 두 텀 동안 랭귀지 스쿨에 다녔었다. 대략적으로 주니어 하이스쿨(7~10학년)과 시니어 하이스쿨(11~12학년)로 연령대를 구분해 클래스가 구성됐었는데, 10학년 과정으로 들어가게 될 나는 주니어 클래스로 배정이 되어 대체적으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과 한 반에서 지내게 됐다.(그때나 지금이나 어딜 가든 나이로 지는 법이 없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 한 가지는 나랑 동갑쯤으로 기억되는 홍콩 친구가 있었는데 키가 나보다도 조금 더 크고 아주 늘씬했었다. 당시 주윤발, 장국영 등을 주축으로 홍콩 누아르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뭔가 홍콩에 대한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 친구의 스타일과 전혀 서툴지 않은 영어실력에 속으로 '우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치 그들은 늘 영화 속에 사는 사람들인 것처럼 뭔가 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던 듯하다.
재밌는 건 바로 그즈음이 한국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가요계가 들썩대던 시점인데, 나는 그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한 상황에서 어느 날 그 홍콩 친구가 내게 한국 가수라며 서태지와 아이들 얘기를 꺼내 들었다. 누구 얘기를 하는지도 전혀 모르겠는데 그 친구의 한국인 펜팔 친구가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줬다며 한번 들어보라고 내게 들이미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수의 노래를 홍콩 친구로부터 소개받는 다소 신기한 상황에 놓였다.
집에 와서 노래를 틀어보니 너무나도 새로운 형태의 음악에 다소 당황스러웠다. 응? 이게 노래라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접한 나의 첫 반응이었다. 아마 나 말고도 국민 대다수가 그렇게 느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그게 참 묘하다. 계속 들어보니 그렇게도 신이 나는 것이다. 그 친구에게 돌려준다고 카세트를 가져갔던 날 무엇인가 랭귀지 스쿨에서 작은 행사를 가졌던 것 같은데,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터져 나가라 틀어놓고 친구들과 마구 춤을 췄던 기억이 난다. 영어 좀 알아 들어보겠다고 매일 안간힘을 쓰던중에 한국 노래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이성을 잃었었지 싶다. 그저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는 시끄러운 한국어 노랫소리에 선생님이 조용히 해달라고 귀를 막으시던 모습이 아른아른 남아 있다.
매일 아침 '지상철'을 타고 랭귀지 스쿨에 갔다. 지상철이라 함은 딱 우리나라의 지하철과 같은데 호주는 지상으로 다니기에 애초에 train(기차)이라 부른다. 우리가 머물던 집에서 대략 10분 정도를 열심히 걸어가면 기차역이 나왔는데, 퍼시픽 하이웨이라는 순환도로 같은 곳을 건너 쭈욱 걸어가면 되었다. 요즘도 아직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유로운 당시 시드니의 특성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참 많이 했다. 못된 건(?) 금방 배운다고 오빠와 나도 심심찮게 무단횡단을 일삼아했었더랬다.
같은 기관에 다니고는 있었으나 뭐 그다지 끈끈할 거 없는 남매지간에 항상 같이 등하교를 했던 건 아니었다. 같이 집을 나섰더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거나 아님 그냥 각자 갈길을 가곤 했는데, 어느 날 아침 혼자 기차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내리려고 출입문을 향해 가 섰는데, 초등학교 정도 된 아들을 데리고 서 있던 땅달보 호주인 아줌마가 뭐라고 해대며 갑자기 나를 밀쳤다.(땅달보란 표현은 지금 이렇게라도 해야 분풀이가 좀 되는 듯하기 때문에 외모 비하 발언은 아니라고 봐주시길 바란다)
그야말로 나는 어떠한 부당한 행동에도 강하게 맞설 만큼 영어에 자신 있지 않았고, 그저 한 대 맞은 똥강아지처럼 물러서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었다.
내려서 학교까지 걸어가는데 갑자기 엄청난 설움이 몰려왔다. 이게 말로만 듣던 차별인가 싶은 것이 도대체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건가 싶으면서 세상 오만 억울함과 서운함이 몰려왔다. 질질 울면서 학교에 갔다. 걸어가던 중 함께 랭귀지 스쿨에 다니던 한국 언니를 마주쳤는데,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스레 묻는 언니 말에 대답도 못한 채 울면서 그렇게 걸어갔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생각했었지만, 하루라도 결석을 하면 큰일 나는 줄로 아시는 부모님 세대 밑에서 자란 나는 그렇게 울면서 학교에 갔고, 하루를 어찌저찌 지냈을 것이다. 사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한 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작은(?) 사건이 있었으니, 귀갓길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실 작은 일이었으나 그때의 순간을 돌이켜보면 자칫 내가 지금껏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여전히 간담이 서늘해지며 아찔한 기분이 들곤 한다.
기차역을 벗어나 집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가뜩이나 낯선 곳에서 그나마 '우리 동네'라고 주변 환경이 조금은 눈에 익숙해진 상태였는데, 저 앞쪽에 우리 오빠가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뭐가 그렇게나 반갑다고 (집에서나 잘하지) 오빠를 발견한 순간 뛰어가기 시작했다. 오빠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다.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생각되는 즈음 마침 오빠가 퍼시픽 하이웨이를 무단횡단으로 열심히 건너가는 게 보였다. 나와 시간차가 크게 나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나도 그냥 가면 무리 없이 건너갈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나만의 계산으로 냅다 뛰었다. 나는 차가 오는지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뛰었고, 마침 달려오고 있던 자전거가 아슬아슬 겨우 나를 피해 달려가며 본인의 놀란 마음을 엄청난 욕으로 퍼부어대며 사라져 갔다. 나는 건널목 중앙 분리대 Safety zone에 서 있던 오빠와 '드디어' 마주쳤고, 뒤돌아 보며 그 상황을 목격한 오빠는 나를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자전거라 그나마 다행이지 자동차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방금 전의 순간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알았기에 나 스스로도 가슴을 쓸어내렸고, 오빠도 엄청나게 화를 냈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 오빠의 화를 받아내며 걸어가야 했다. 내가 겨우 오빠한테 '미쳤냐' 소리 들으려고 그 길을 뛰어왔던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엄마를 마주하자마자 왈칵 터져 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 내 옆에 오신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으셨다. 그냥 한참을 꼭 안아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엄마의 따뜻함으로 겨우 진정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 엄마의 품이 정말 많이 그립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저 멀리 보이는 내 가족의 모습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반가운 마음, 안도의 마음, 낯섦 안에서 발견하는 익숙함.. 그렇게 열심히 오빠를 따라잡으려 뛰었던 내 맘을 누군들 알 수 있었을까..
글을 적어 내리고 보니 호주는 뭔가 살기에 퍽퍽한 나라일 것 같다는 뉘앙스만 남긴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렇게 내 나름 힘겹게 적응해가며 이후 13년을 살아본 결과, 호주에는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니 내가 처음 낯선 환경을 맞이하며 겪었던 어려움과 설움은 그저 자연스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던 것으로 정리하면 될 것 같다.
오해할까 봐 굳이 해명하자면, 부모님이 한국으로 돌아오신 후 오빠와 나는 대략 10년간을 둘이서만 지냈는데 다투기도 많이 다투고 여느 남매들과 다름없이 투닥거리며 지냈지만 그 세월 덕분인지 지금은 무슨 남매가 그리 친하냐 소리 들을 만큼 오빠와는 관계가 돈독하다. 원래 나이가 들면 다들 철이 들어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어릴 적 철없던 시절 우리 오빠와의 애증 넘치는 에피소드들은 앞으로도 조금씩 풀어놓게 되지 싶다.
그날 위험했던 건널목의 순간은 가끔씩 떠올라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지만, 그래도 그때 안 죽고 잘 살아온 걸 보면 명이 그리 짧지는 않았나 보다. 이렇게 글로 그 순간 놀랐던 마음을 다시 마주했으니, 분명 이제는 내 맘속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두려움과 무서움이 다 해소됐으리라 믿는다. 글쓰기는 치유의 힘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