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다행히도 세종문화회관까지 한 번에 데려다 줄 버스가 있어 편안한 맘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대학 시절부터 좋아하는 공연은 혼자서도 잘 찾아다녔던 터라, 지금까지도 나는 굳이 옆에 함께할 파트너가 없어도 공연 보러 가는 길이 너무도 즐겁다.
애초부터 7월 7일 마티네 공연 예매를 해둔 터였는데, 6월 18일에는 막이 올랐어야 할 비틀쥬스 공연이 기술적인 문제가 발견되었다며 두 차례나 개막일을 미룬 것이다. 그러다 7월 6일 드디어 대망의 국내 초연 라이선스 뮤지컬 비틀쥬스의 막이 올라갔고, 나는 본의 아니게 개막 둘째 날 공연을 관람하는 샘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기술적인 문제들이 그리 많을까 싶었지만, 초연이니만큼 새로 들여왔을 무대 장치며 연출 등에 있어 배우들과의 합을 모두 맞춰보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안 봐도 그림이니, 꼼꼼하게 준비를 하는구나 싶어 오히려 내게는 긍정적으로 보였다. 다만 7월 6일 이전에 예매를 해두고 기다리다 가차 없이 취소당한 관람객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뉴스였겠지만 말이다.
※ 마티네(matinee) - 연극, 영화 등의 주간(낮 시간) 공연/상영
애초 유준상 배우님은 오래전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히트 드라마를 통해 팬이 되었는데, 사실 뮤지컬 무대에 서시는 건 알고는 있었어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그가 라이브 무대 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가 상당히 기대가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탤런트로만 알고 있던 김지우 배우님도 뮤지컬 배우로 전향한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 어떤 모습일지가 궁금했는데, 이날 캐스팅 변경이 있어 마침 두 분이 함께 출연하는 무대를 만나보게 되어 기대가 많이 되었다.
1988년에 개봉되었던 팀 버튼 감독의 동명의 영화 비틀쥬스를 뮤지컬로 제작한 것인데, 2018년 워싱턴 내셔널 시어터에서 첫 공연을 올린 후 2019년에 브로드웨이에 입성하였다. 오픈런(Open-run)으로 공연이 지속되는 브로드웨이에 발을 들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안타깝게도 2020년 코로나 시국을 맞이하여 극장들이 모두 문을 닫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폐막이 된 상태라고 한다. 그런 와중에 해외에서는 "최초"로 올리는 라이선스 공연이 바로 이번에 서울에서 막을 올린 것이다. 그러니 브로드웨이 제작자들도 그 어느 때보다 서울 공연 준비에 있어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 오픈런( Open-run)
오픈 런이란 공연이 끝나는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것을 말한다. 오픈 런은 상연 기간을 미리 확정하는 ‘리미티드 런(Limited Run)’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흥행 여부에 따라 공연이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공연 시작 30분 전, 오디토리움에 입장했을 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와우~' 소리가 절로 나오게끔 현란하게 꾸며져 있었다. 사방으로 쏘아대고 있는 붉은색과 파란색의 핀 조명들과 저세상 텐션을 불러오려는 듯 다소 묘한 느낌의 백그라운드 음악이 오디토리움에 퍼져 나오고 있었다. 무대 전면 테두리를 삥 둘러싼 LED 패널들 하며, 뭔가 테크니컬 한 요소가 정말 구석구석 많이 들어갔구나 싶은 것이, 왜 기술적인 문제가 지속 발견되어 개막을 미뤄야만 했는지 조금은 짐작 가능한 부분이었다.
스토리는 열여섯 살 소녀, 리디아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엄마를 그리워하는 리디아가 새로 이사 온 집에서 귀신들(비틀쥬스와 그 집에 살고 있다 죽은 신혼부부 바바라와 아담)을 보게 되면서 엄마를 찾아 저승까지 드나들게 되는 판타지물이다. 이 뮤지컬에서 뭔가 진지하고 똑 부러지는 대 서사시를 기대하는 관객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소 유치하고 맥락 없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관객에게 기대하는 건, 그 어떠한 진지함과 감동의 코드가 전혀 아니다. 뮤지컬 비틀쥬스는 온전히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만들어졌고, 처음부터 끝까지가 오롯이 'Show'에 집중된 말 그대로 쇼 타임이라고 생각해야 작품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에 가슴을 적시는 감동의 뮤지컬 넘버들을 원한다면, 비틀쥬스는 절대 어울리는 취향이 아니라고 알려드리고 싶다.
음악은 호주 출신의 작곡가 에디 퍼펙(Eddie Perfect)의 손에서 탄생됐는데, 장르는 너무나 명백한 현대 팝뮤직이라 봐야 할 것 같고, 악기 구성도 오케스트라라는 단어는 사실상 어울리지 않는 일렉트로 밴드라고 해야 어울릴 사운드였다. 개인적 느낌상, 본 적은 없으나 마치 라스 베이거스에 올라가야 제대로 어울릴 것 같은 제대로 'Showbiz' 장르에 가까운 작품이라 생각된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비틀쥬스가 관객들과 활발한 소통을 한다. 이게 관전 포인트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잘 사용하는 시의적절한 비속어까지 모두 포함하여 쉴 새 없이 속사포처럼 찰지게 날려대는 대사에 사실 집중하여 듣지 못한다면 자칫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온전히 비틀쥬스가 이끄는 대로 극 안에 함께 빠져들다 보면 쉴 새 없이 웃음 포인트들이 예고 없이 튀어나와 3시간 동안을 꽤나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 작품을 번역하신 분들께 엄지 척을 올려드리고 싶다. 분명 쉽지 않았을 텐데 가장 지금 우리의 언어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피트 바로 앞에 배치된 '저세상석'이 두 줄 있는데, 사실 무대가 '코앞'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려니 생각은 했으나, 역시 좌석명을 특별히 지어놓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음악감독님이 무대 정중앙 위치에 서지 않으시고 약간 좌측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시작부터 좀 의아하다 생각은 했었는데, 극이 진행되어가며 보니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뭐가(??) 자꾸 나온다. 상당히 즐거운 깨알 재미들이 그곳에서 잔뜩 일어나니 기회가 된다면 저세상석을 한번 노려보는 것이 이 작품을 200% 즐기는 최고의 방법이 되리라 생각된다. 나도 가능만 하다면 사실 그 자리에서 한번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단 욕심은 나는데, 개막일이 거의 한 달 가까이 미뤄진 만큼 남은 공연일 수가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좀 안타까울 따름이다.(수익은 뭘로 내시는지 궁금)
벌써부터 티켓 구하기가 어렵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니 말이다. 제작자님은 나처럼 초기에 공연을 관람하고 와서 극찬을 아끼고 있지 않은 사람한테 엄청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극장 스케줄만 가능하다면 연장 공연을 고려해주면 정말 좋을 텐데 어찌 될는지 한번 기대해 볼일이다.
전체적으로 음악도 신나지만, 볼거리로서는 여태 본 중 단연 최고였다. 사방에서 번쩍대는 조명들, 화려한 무대장치와 소품들, 수시로 등장하는 인형들(?)하며 갖가지 요소가 잠시도 지루할 틈을 내주지 않는다. 역시나 천조국의 뮤지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 돈을 발랐다는 게 티가 나는데, 그렇게 무대장치에 공을 들여서인지 배우들 의상비는 상대적으로 좀 아꼈나 싶게 의상 체인지로 관전 포인트를 잡지는 않은 듯하다. (다른 작품 대비 단출하단 의미이지 모두가 단벌신사는 아니다)
극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비틀쥬스의 이름을 세 번 불러줘야 그가 다시금 이생으로 돌아올 수 있는데(사람이 될 수 있는데), 마지막 커튼콜에서 그 사실을 차용하여 그의 등장 전에 전 출연진들이 '비틀쥬스!'를 세 번 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그렇게도 리디아가 이름을 세 번 불러주지 않아 애타 하더니 마지막은 속 시원하게 모두가 불러주었다.
국내 초연 작품을, 게다가 해외 라이선스 최초 공연을, 그것도 막 오르고 두 번째 공연을 관람했다는 게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처음이다 보니 살짝 음악감독님 속 타겠네 싶게 싱어들이 앞서가는 부분이 좀 들렸는데, 첫 주 공연이니 그런 건 지적질 안 하는 걸로... 점차 회를 거듭할수록 완성도는 더 높아져 갈 테니 말이다. 뮤지컬을 접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은 더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볼 만한 작품이다. 그리 어려운 부분이 전혀 없고 그야말로 심심하고 지루할 때 나를 엔터테이닝 해줄 볼거리 가득한 재미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관객들 반응이 괜찮다면 예정보다 좀 더 오래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길 조심스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