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공간 속에서 보물 찾기를 하듯 '구멍가게'를 들락거리는 일이 어린시절의 낙이었다. 알사탕 같은 구슬을 한 묶음 사들고 돌아오는 날이면 주머니 속 짤랑거림이 좋아 더 오래 거닐었다. 어른이 되고 삶에 치이는 날이면 골목에 있는 '구석집'을 찾았다. 간판 하나 제대로 없어 동네 사람들만 아는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그 조그맣고 아담한 공간에 숨어 야채곱창에 어묵 한 그릇을 시켜 호호 불어먹었다. 동네를 떠나오기 전 그 조그만 술집 모퉁이에 앉아서 보냈던 모든 순간은 위안이었다.
구석이 사람에게 내어주는 평온함은 무엇 때문일까. 구석이란 잘 드러나지 않아 치우친 공간을 의미한다. 사람의 마음이나 사물에서 또렷하게 도드라지지 않는 부분을 말한다. 마치 눈을 감고 구석을 떠올리면 단단한 벽이 가로와 세로로 만나 높이를 이루는 삼각뿔 귀퉁이가 떠오른다. 그 작고 안락한 안전지대 속에서 날숨에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고 비로소 쉴 수 있다. 다소 폐쇄적인 공간성 때문에 여름의 구석은 대체로 시원하고 겨울의 구석은 훈훈하다. 때문에 서운하거나 아픈 날 몸을 모로 뉘어 꼼짝하지 않고 싶은 안전한 공간이 되어준다.
구석은 사람들의 말속에서도 존재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당당하게 만드는 요인을 두고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작용할지 안 할지 모르지만 마치 보험을 들어둔 듯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반면 '집구석'이나 '촌구석'처럼 무언가를 천하게 낮춰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낮춰 부른다는 건 부정적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애써 격식을 갖춰 꾸미지 않은 편안함이 되기도 한다. 집이야 말로 구석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지 위에 벽을 세우고 용도 별로 구석구석 이름을 붙여 방을 만든다. 그 방 안에서 책상 아래와 소파 옆, 장롱 밑 등 수많은 방구석들이 탄생한다.
누구에게나 홀로여도 좋을 안전한 구석이 있다. 그런 구석을 집 안에 둔 사람이 있고 밖에 둔 사람도 있다. 또한 구석은 사람 마음속에도 있고 관심 밖에서도 존재한다. 중요한 건 구석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구석은 온전한 자유를 제공한다. 본연의 나로 돌아가 호기심을 갖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는 시간들이다. 살면서 얼기설기 얽히고 빈 부분을 채워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한 때 잃어버려 잊고 살았던 물건들을 구석에서 선물처럼 찾을 때도 있다. 그 어둡고 음침하고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공간이 가구를 이동하며 드러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구석이 점차 밝고 깨끗해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발달한 기술만큼 위생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항공기 모터를 탑재한 청소기와 살균용품들은 그 어느 때보다 청결한 실내 공간을 제공한다. 반면 산업 발달에 따른 오염으로 실외 환경은 점차 열악해지고 있다. 실내와 실외의 환경 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극을 향해가고 있다. 기술 발달은 또한 사람들의 밝기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매번 새로 나오는 LED전등과 핀조명은 점차 조도를 높여 밤을 낮처럼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이토록 고도 발전된 사회에서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야성의 도시에서 점차 잠 못 드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곁은 내어주던 구석은 이제 스마트 폰 화면을 마주한다. 내면의 자아가 주체적으로 사고를 하던 동굴 속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구석은 구석다워야 한다. 함께 건강한 연대를 지속하기 위해선 숙고의 시간인 자발적 고독이 필요하다. 성숙한 자아 형성은 혼자 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겨우내 잘 익은 김장김치가 독 안에서 숙성의 과정을 거친다. 땅속에서 보낸 시간 동안 스스로 발효되어 톡소며 아삭하고 시원한 맛을 낸다. 그 결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사계절 보양식이 된다. 잠시 세상 속 평판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기만의 구석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사진.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