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 번

사랑하니까 미움이 생긴다

by 리뷰몽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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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입학식을 하던 날이었어요. 지나가는 말로 큰 고모가 묻더군요. "엄마는 연락 없어?"


바늘로 심장을 찌르면 그런 느낌이 들까요. 고모가 조금은 주저하듯이 물었더라면 화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왜 전화를 해."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려고 더 모질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의 서랍 속 사진이 바닥이 날 무렵부터 엄마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약에 취한 듯한 모습만 보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었고요. 그런 날은 엄마의 옷장 속에서 찾은 일기장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요양원에 가기 전이면 나는 엄마 집에 들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이른 아침부터 엄마의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있는 작은 옷장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옷장 서랍에는 작은 노트들이 빼곡하게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엄마는 꼭 할머니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그런 날은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할머니의 목소리를 엄마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할머니의 목소리에도 힘은 없었지만 엄마보다는 더 나아 보였어요. 그게 왜 심술이 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외삼촌은 아직도 엄마에게 화가 나 있었고 나는 그런 외삼촌이 원망스러웠어요.


오늘은 사회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정말 눈 앞에 불이 번쩍였다. 아픈 것보다는 반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맞았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잠들어 있는 엄마 옆에 앉아 일기장을 한 장씩 들춰가며 읽다보면 내가 모르고 살았던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곤 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도서관 마당에서 까치를 보았던 일. 군대에 간 동아리 선배에게 남몰래 러브레터를 보낸 일, 첫 눈이 오는 날 아빠에게서 고백을 받았던 일.


"엄마 어떻게 만났어?" 가족끼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지우 엄마 옆에 앉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엄마를 어떻게 만났냐고. 이제 와서 사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괜한 반항심이 생긴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지우 엄마는 당황한 듯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보이며 "나도 궁금하네, 대답해 봐요. 어떻게 만났어요?" 갑자기 숟가락을 던져 버리고 싶었습니다.


엄마의 서랍 속 사진이 바닥을 드러내자 나는 엄마가 간직해 오던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필름을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부터 배워야 할까. 이리저리 만져 보다가 카메라를 들고 엄마의 병실로 찾아갔습니다.


환한 햇살이 비추이는 병실 안은 항상 비릿한 냄새가 났습니다. 늙어가는 냄새. 초라해져 가는 냄새. 늘 그랬듯이 몸에 향수를 잔뜩 뿌리고 엄마 옆에 앉았습니다. 오랫만에 엄마는 맑은 눈으로 나를 보았어요.


"선생님한테서는 참 좋은 냄새가 나네요." 나는 웃으며 엄마에게도 향수를 뿌려주었습니다. 방긋 웃는 엄마. 그리고 가방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어 보여주며 "기억나?" 하고 물었어요.


이게 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살펴보던 엄마는 "알지. 이걸로 우리 딸 사진을 찍어줬지." 한 마디를 하더니 크게 하품을 했습니다.


"아가씨, 나는 자야겠어요. 내일 일찍 일어나서 우리 딸이랑 사진 찍으러 가야하거든요. 안녕히 가세요.그리고 이제 오지 마세요. 아가씨 자꾸 오는 거 나는 싫어."


고등학교 입학식이 지나고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나는 졸업을 하게 되었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 번, 두 번 벨이 울리고 여러 번 벨이 또 울려도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오기가 생겼고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를 해댔어요. 그리고 날카로운 알림과 함께 도착한 문자 한 통.


엄마한테 전화 하지마.


처음에는 엄마의 전화 번호를 지워버렸습니다. 하지만 내 머리속에 저장된 엄마의 번호가 지워지지는 않았어요. 졸업식이 뭐라고. 그깟 졸업식이 뭐라고. 누가 봐도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 오는 지우 엄마가 있는데. 엄마를 찾는 내가 그렇게 미울수가 없었습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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