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에 라디오를 트니 22년 전 유행가 박화요비의 'Lie'와 god의 '거짓말'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늘이 만우절이구나. 어떤 거짓말로 오늘 만날 사람들에게 장난을 쳐볼까? SNS 글에 달린 댓글을 보니 글자를 모두 거꾸로 써놓은 게 보였다. '요아좋 말정' 응? 난 이미 거꾸로 말하고 살고 있는데. 위선을 떨며 가식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데 여기서 거짓말을 어떻게 더 한단 말인가? 그들 앞에 내보이는 나는 열심히 치장하고 꾸며서 내놓은 가짜고, 여기 차 안, 집 안에 있는 게 진짜 나다. 그럼 오늘은 거꾸로 해보는 거다. 가면 쓰지 말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할까 꾸미지 말고 원래의 나를 보여주기로 한다. 어색하단 눈치가 감지되면 하하 웃으면서, 만우절이잖아요~! 하면 되니까.
비좁은 강의실에 들어서며 몇 안되는 수강생들에게 안녕하세요!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오랜만에 만나 몹시 반가운 사람이 두 사람이나 있다. 이 날까지 얌전빼다가 호들갑을 떨며 인사하면 좀 지나칠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와~오랜만이에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감정을 듬뿍 싣는다. 어디에 앉을까 슬쩍 눈치를 본다. 화면이 앞사람에 가려지지 않게 선생님이 정면으로 보여 집중이 잘되는 맨 앞자리에 앉겠다고 서둘러 찜한다. 앞자리 두 개는 누구누구 지정석인데~ 주워들었던 말을 오늘은 그냥 흘린다. 정해진 게 어디 있나요? 모든 게 거꾸로 가능한 만우절인데요. 강의가 시작되고 큰 화면 안에 알몸으로 요상한 자세를 취한 조각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여성의 몸은 흉부를, 남성의 몸은 음부를 가장 유심히 보는 내 본능을 오늘은 숨기지 않기로 한다. "저 포즈는 노골적으로 성기를 자랑하는 포즈 같은데요~ 눈이 자꾸만 그쪽으로 가네요 호호호"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런 나의 태도는 모국어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다. 내 모국어는 남쪽 섬의 사투리로 감정을 지나치게 투영하고 있다. 생의 주기에 맞춰 내 역할이 달라질 때마다 새롭게 언어감각을 배웠어야 했는데 오늘 들은 수업은 3차로 습득하고 있는 언어쯤 된다. 2차 언어는 스무 살 때 익혔다. 어리숙하지 않은 도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햄버거 시키는 방법, 음료 종류와 영어로 된 디저트를 외웠다.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아이를 낳아서는 또다시 부모의 언어를 학습해야 했다. 모든 것은 내 영역밖에 있고 나는 늘 새로 배워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애써야 하는 존재인가? 그렇게 새로 배우고 달라진 언어는 1차적인 감정만 빼놓고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첫애를 낳고 육아 심리강좌를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강사는 기억나지 않은 유아기때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방법으로 청중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이 무대 위로 당신 어머니가 걸어 나온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 저 문을 열고 들어와 이 앞에 선 당신 어머니는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어떤 표정입니까? 강사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수도꼭지가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어머니는 뒷모습인 채로 무의식에서 걸어 나왔고, 내 앞에서도 등을 돌린 채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날 돌아보지 않는 어머니를 보며 울고 있는, 무의식에 봉인된 신생아때의 이미지를 만났다. 아버지와 싸워 자주 집을 나갔던 어머니와 언어발달기에 있던 나와의 관계는 그 때 훼손되었고 방치되었다. 유아기 때 어머니와의 관계가 아동의 성격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맞다면 그 때 공감받지 못한 1차 언어는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이다. 힘들 때 이것이 진짜 힘든 게 맞을까?라는 내 1차적인 감정에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의 동의가 필요했으니까. 내 마음과 감정을 꿰맬 시간 없이 새로운 환경에 진입하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오다 보니 내 마음의 언어조차 타인을 이용해 번역하고 살아왔다.
미술사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으로 수강생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섰다. 좋아하는 수강생들이 모인 테이블에 얼른 가서 한자리 잡아 앉는다. 새로 오신 분에게 나이를 묻는 건 실례일까? 고민 따위는 삼켜버리고 낯가림이 없다는 듯이 말을 건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말하면 내 수준을 들키지 않을까? 다들 양이 많다고 하는데 밥공기를 다 비워놓고 가장 늦게 젓가락을 놓으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모든 것들도 만우절이니까 반대로 눈치를 내려놓는 거다.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성미를 참지 않고, 술 마시고 춤추며 놀기 좋아하는 나를 긍정하며 소크라테스의 '향연'을 실현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오늘 쟤 왜 저렇게 신났어?' 힐끔거리든 말든 비언어적인 욕구에 눈금자를 대보지 않는 것이다.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해서 관계라는 당근을 얻는다 해도 진짜 내가 없으면 허기가 채워질 수 없다. 주양육자와의 어릴때 관계가 아동의 성격과 발달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지만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고 내가 어떤 욕구를 가진 사람인지 스스로 알고 있으므로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15세기 유럽에서 유래된 만우절은 농사가 시작되는 춘분을 기념하기 위해 가볍게 장난을 치던 풍습이었다. 봄이 시작되어야 새해였고 그 날이 4월 1일이었다. 1월 1일에 시작한 관계에 다가가기 위해 진짜 나를 너무 멀리 떨어뜨려놓으려고 할 때 4월 1일의 만우절을 생각한다. 거짓가면을 쓰고 살다가 퍼뜩 정신차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날.
만우절 만남이 끝나고 일어날 시간. 더는 아쉬워하지 않고 나한테 주어진 시간만큼 있다 나온다. 내 욕구에 따라 쾌락을 선택하면서 분열을 겪지 않았던 오늘이 만족스러웠는지 룸미러 안의 내 얼굴이 활짝 웃는다. 망했다. 빨갛게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는 치아 사이로 음식물 찌꺼기가 여기저기 끼어있다. 아차! 손을 가리지도 않고 눈주름이 자글자글해지도록 깔깔 웃었는데 이 지저분함을 보고 그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렇게 웃고 떠들 시간에 화장실 한번 다녀올 걸, 속없이 웃는 나를 보던 사람들의 영상을 다시 돌려본다. 소용없다. 만우절 한정판 필름은 벌써 내 손을 떠났다.